안 상 헌(감이당 금요대중지성)

니체는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면서 이전의 사상들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각을 세운다. 하나는 중세의 암울한 터널로 표현되기도 하는 ‘신’, 다른 하나는 플라톤에서 시작된 ‘이데아’ 혹은 ‘이성’ 중심의 세계관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신이든 이성이든, 그것에 접근해가는 방식은 형이상학적이었다는 것. 반면에 니체는 자신의 철학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을 사유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 결과 탄생한 니체의 ‘생철학!’ 덕분에 우리는 그의 철학을 따라가며 각자의 사유를 키우며 삶의 지혜를 연마하고 있다. 이런 우리에게 최근 풀어야 할 하나의 과제가 주어졌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외치는 세상! 그것도 청년들이!

이생망의 세상, 무엇이 망했다는 것인가?

얼마 전 니체 세미나에서 한 학인이 ‘이생망’을 주제로 발제를 했다. 공부를 해도 취직이 어렵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스스로를 ‘쓰레기’ 같은 인생이라 비하하고, 직장 생활을 해도 아파트 한 채 장만하기는 글렀고, 결혼도 하기 쉽지 않고 등등.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겪는 이런저런 어려움이 포함된 내용이었다. 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니 ‘이번 생은 망했어!’라고 할 만했다. 이어진 토론에서 기성세대들에 대한 청년들의 괜한 트집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영혼까지 다 끌어모아야 반듯한 직장을 얻을 수 있고, 부부의 영혼을 다 합쳐도 집 한 채 장만하기 어려운 요즘 청년들이 처한 냉혹한 현실을 말해주는 키워드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청년들의 이 냉소적인 태도를 쉽게 볼 것은 아니라는 말에 많은 부분 공감이 갔다. 지금 청년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힘겨워하고, 자기 비하적인 말을 하며, 이들의 내면으로 우울함이 스며들고 있는 이 모습들이 생철학자 니체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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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니체가 유럽의 데카당스적 풍토를 사유하고 그 극복의 길을 열어갔듯이 우리도 오늘 청년이 처한 이 우울한 삶의 문제를 풀어가 보자. 니체의 눈에 지금 청년들이 외치는 ‘이생망’의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우리처럼 ‘망했다!’를 외치고 있을까? 아닐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니체는 잘 망했다고 할 것 같다. 니체는 청년들이 망했다고 외치는 삶, 즉 세상이 정해놓은 삶의 경로를 따르는 바로 그 삶, 그것을 전복하고 새로운 삶의 길을 여는 것이 자신이 철학을 한 이유라고 할 것 같다. 그리고 니체는 물을 것이다. 이 경로는 오히려 청년들의 삶을 왜소하게 하는 길인데, 그것의 성취가 어렵다고 왜 청년들이 스스로 망했다고 자책해야 하는가? 이는 마치 니체 당시 ‘신’과 ‘이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망상이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생한 삶을 볼 수 없도록 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좋은 삶을 위해 갖추어야할 온갖 것들’은 청년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이것들은 대부분 청년들이 스스로의 삶에 대해 눈을 뜨게 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니체의 눈으로 본다면 오늘 우리 사회에서 ‘좋은 학벌과 직장’, 그리고 ‘좋은 결혼과 좋은 집’을 위해 영혼까지 팔아야 하는 청년들의 삶은 어떨까? 스스로 왜소해질 수밖에 없는 길을 가면서 힘겨워하는 모습들이 보일 것이다. 이렇듯 잘못된 생각이 당대 인간의 삶을 왜소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니체 당시나 지금이 동일하다. 니체는 이를 ‘형이상학의 근본 문제들’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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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형이상학이 특히 실체와 의지의 자유에 관계해온 한, 우리는 형이상학을, 인간의 기본적인 오류를 근본적인 진리인 것처럼 취급하는 학문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니체, 인간적 Ⅰ』, 형이상학의 근본 문제들, 책세상, 42)

그렇다. 청년들이 강요받고 있는 ‘좋은 학벌, 좋은 직장, 좋은 결혼, 좋은 집’은 니체가 자신의 ‘생철학’을 위해 각을 세운 ‘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나, 있지도 않은 ‘이데아를 찾아 헤맨 이성’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니체는 자신의 사유를 위해 각을 세운 형이상학, 즉 당시 세상을 끌고 간 학문의 근본적인 문제를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니체와 같은 질문과 비판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인간이 찾아 헤맨 저 안락하고 행복한 세상으로 가는 길, 청년들이 영혼까지 끌어모아 얻고자 하는 저 세상에 어떤 삶이 있는지를 숙고해보자. 그런 세상이 없기도 하려니와 있다고 한들 이제 얻을 수도 없는 먼 신기루와 같은 세상이 되고 말았다.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20년 이상을 모아야 살 수 있는 것이 오늘의 아파트 한 채이니, 우리가 꿈꾸는 이 세상은 현실적 가능성의 측면에서도 없는 것이 맞다. 혹시 있다면 그것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것이다. 그것은 니체 시절, 세상을 주도했던 사제들, 혹은 귀족 신분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사제들이나 귀족들에게조차 그들이 있다고 믿었던 ‘신’도 세상을 영원히 지배할 ‘유일한 진리’도 사실은 없었다.

니체 당시 신에 대한 믿음을 놓으면 모두 망한다고 했다. 절대적인 이성을 믿지 않으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모두 이 믿음을 강요당했다. 훗날 이런 신과 이성을 비판한 사람들조차 이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다른 대체물들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 대체물들은 현대 사회에서 ‘돈’과 ‘권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다양한 물질과 지위 등, 아주 현실적인 것으로 변형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이것을 찾아 헤매다 지친 사람들은 세상이 허무하다고 자책하고 있었다. 마치 오늘의 우리 청년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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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청년들은 거대한 이상을 쫓는 것은 아니다. 너무나 현실적인 것을 갈구한다. 좋은 학교, 스펙, 직장, 결혼 등등 얼마나 현실적인가? 그런데 이 너무나 현실적인 것들이 이제 신격화되어 버렸다. 일상의 삶을 배우고 꾸려가야할 것들이 너무나 멀리 있어, 죽기 살기로 달려가도 얻기 어려운 것이 되어 버렸다. 일상의 삶을 꾸려간다는 관점에서 보면 ‘신’과 ‘이성’, 이것도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니체도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 머리를 잘라버릴 수는 없다.”(니체, 『위의 책』, 30)고. 영혼과 이성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는 말이다. 삶은 언제나 영혼과 이성이 함께 한다. 하지만 그 영혼과 이성이 형이상학적인 것이 되는 순간 그것들은 우리의 삶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떠나가 버린다. 이는 마치 폭풍을 헤쳐가야 할 뱃사람에게 물에 대한 분석을 늘어놓은 것처럼 의미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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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폭풍의 위험에 처해 있는 뱃사람에게 물에 대한 화학적 분석을 인식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 없는 일임이 틀림없다.(니체, 위의 책, 형이상학적 세계, 30)

니체는 우리가 그동안 진리를 담은 ‘학문’이라고 믿었던 것, ‘형이상학’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 ‘신’이라는 실체와 확실한 것이라고 믿었던 ‘이데아, 혹은 이성’. 이것들이 인간의 삶에 어떤 것이었을까를 사유했다. ‘이생망’을 외치는 청년들, ‘영끌’을 외치는 청년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세상과 삶은 어떤 것일까? 세상은 이것들이 좋은 삶을 위해 현실적으로 너무나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들이라고 끝임없이 외칠 것이다. 이것들은 니체가 비판한 저들의 세상에서는 분명 의미가 있고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청년이 스스로의 결함을 극복하면서 자기 삶의 길을 건강하게 만들어가는 것’이 니체가 바라는 삶이라면, 이들이 꿈꾸는 희망적인 세상에 니체가 원하는 삶은 없다. 여전히 형이상학적인 희망만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희망 고문’이라고 또 자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것은 망해도 좋은 삶이다.

내 영혼을 집중해야 할 곳을 찾아서

정신을 집중해야 할 곳이 있다. 마음을 다해야 할 곳이 있다. 아마 영혼을 온전히 집중해야 할 일과 때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고 언제일까. 니체 시절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신’도 아니었고, 있지도 않은 ‘이데아’도 아니었듯이, 오늘 우리 시대에는 감당할 수 없는 집도, 이런저런 화려한 삶도 아니다. 우리의 정신과 마음, 그것을 담은 영혼이 집중해야 할 일과 때는 따로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 삶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과 때일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당장은 막연하다. 또 새로운 길을 가려니 불안하고 두렵기도 하다. 우리를 이끌어줄 어른도 없고,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들도 모두 사라졌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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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은 회의적인 출발점을 인정해보라 : 만약 다른 형이상학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우리에게 알려진 유일한 세계에 대한 모든 형이상학에서 나온 설명들이 전적으로 소용없는 것이라면, 그때 우리는 어떤 눈길로 인간과 사물들을 보게 될 것인가?(니체, 위의 책, 회의(懷疑)의 추정적 승리, 책세상, 44)

니체는 그 동안 우리가 붙들고 있었던 모든 것은 더 철저히 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우리도 한 번쯤 ‘이생망은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왜 내가 아직도 세상이 좋다고 하는 것들을 쳐다보며 그것을 마련하는 일에 끌려다니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이런 일에 나의 영혼을 파는 것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이 아닐까를 생각해보자. 이런 회의(懷疑)는 내 영혼을 집중해야 할 곳을 찾아가는 출발점이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집중할 곳을 찾아나선 청년은 자신의 삶을 함부로 비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눈길을 돌려, 우리가 영혼을 쏟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 과거와는 다르게! 과거의 공부가 세상에서 좋다고 정해져 주어져 있는 것들을 얻는 일에 있었다면, 지금 우리의 공부는 오늘, 나의 삶을 묻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오늘, 나의 삶을 위해 어떤 공부를 해야 하고, 일은 어떻게 해야 하고,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하고, 사람은 어떻게 만나야 하고, 공동체 혹은 조직은 어떻게 꾸려야 하고, 거기에 필요한 기능은 어떤 것이 있으며, 변화하는 상황에서 발휘해야 할 지혜들은 무엇이며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를 묻고 탐색하고 훈련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삶으로서의 공부와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공부와 일은 영원하면서도 늘 새로울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중년인 나도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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