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형진(감이당 장자스쿨)

山雷 頤   ䷚

頤, 貞, 吉, 觀頤, 自求口實.

이괘는 바르게 행하면 길하니 사람이 길러내는 것과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는 방법을 관찰한다.

初九, 舍爾靈龜, 觀我, 朶頤, 凶.

초구효, 너(초구 자신)의 신령스런 거북이를 버리고 나(육사)를 보고 턱을 늘어뜨리니 흉하다.

六二, 顚頤, 拂經, 于丘, 頤, 征, 凶.

육이효, 거꾸로 (초구효가) 길러 주기를 기다리니 이치에 어긋난다. 언덕(상구)에게 길러 달라고 하면서 나아가면 흉하다.

六三, 拂頤貞, 凶, 十年勿用, 无攸利.

육삼효, 길러 주는 바른 도리에 어긋나 흉하니 10년 동안 쓰지마라. 이로울 바가 없다.

六四, 顚頤, 吉, 虎視耽耽, 其欲逐逐, 无咎.

육사효, 거꾸로 (초구효가) 길러 주기를 구하지만 길하니 호랑이가 상대를 노려보듯이 하고 그 바라는 것을 계속 추구해 나가면 허물이 없다.

六五, 拂經, 居貞, 吉, 不可涉大川.

육오효, 이치에 어긋나지만 올바름을 지키고 있어 길하다. 하지만 큰 강을 건널 수는 없다.

上九, 由頤, , , 利涉大川.

상구효, 자신으로 말미암아 길러지니 위태롭게 여기면 길하다.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롭다.

2020년, 경자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다가오는 새해를 준비하는 시기이다. 그래서인지 내년 공부를 어떻게 할지를 삼삼오오 모여 고민하는 학인들이 보인다. 그렇다면 나는 내년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글쎄… 올해 공부가 아직 마무리가 안 된 듯해서 뭐라고 얘기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올해 공부를 디딤돌 삼아서 계속 정진하겠다는 말은 할 수 있겠다. 올 한 해 동안은 여러 학인들과 각자가 선택한 동서양의 고전을 ‘따로 또 같이’ 읽었다. 그런 덕분에 <금강경>과 <우다나>,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 스피노자의 <에티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와 <도덕의 계보학> 등의 여러 고전을 한꺼번에 접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그 고전을 통해서 각자가 고민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각자의 고전을 곱씹고 곱씹어 자기의 삶으로 가져오려는 모습들 속에서 고전을 읽는 새로운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비록 올해 공부를 통해서 고전 리라이팅이라는 미션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고전에서 얻은 지혜를 곱씹고 곱씹는 데서 그 재미가 우러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삶을 위한 영양분으로 쓰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치 좋은 음식을 같이 나누면서 꼭꼭 씹어 각자의 몸에 필요한 영양분으로 쓰는 것처럼 말이다. 고전에서 얻은 지혜가 ‘삶과 몸을 기른다[養]’는 생각에 이르면서 산뢰이(山雷頤)괘가 눈에 들어왔다.

laura-kapfer-hmCMUZKLxa4-unsplash

‘이(頤)’는 ‘기르다, 보양하다, 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이’를 괘명으로 하는 이괘는 위에 멈춤[止]을 상징하는 간(艮)괘가, 아래에 움직임[動]을 상징하는 진(震)괘가 자리하는 괘상이다. 그것은 산 아래에서 생명의 꿈틀거림이 있고, 그것을 산의 중후함으로 지긋하게 덮어줘서 생명이 길러질 수 있도록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기르다’는 뜻을 가진 ‘이’를 괘명으로 한 것이다. 6개의 효를 보면, 초효와 상효가 양효이고, 중간 네 개의 효가 음효이다. 이것은 마치 사람의 턱처럼 상구효가 위턱이고, 초구효가 아래턱, 가운데 음효가 치아라고 생각할 수 있는 모양이다. 위의 턱은 움직이지 않고, 아래턱이 움직여서 음식물을 씹는 모습이 연상된다. 이는 괘의 배치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위의 간괘가 멈춤이고, 아래의 진괘가 움직임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괘상 때문에 ‘음식물을 잘 씹어서 몸을 기를 수 있도록 한다’는 뜻과도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이러한 뜻들을 담은 이괘는 ‘만물의 길러짐’과 ‘길러짐의 때’라고 한다. 동서양의 고전공부를 하고 있는 지금이 고전에서 얻은 지혜를 통해서 내가 길러지고, 기르는 때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지금이 내 삶에서 이괘의 때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norja-v-G0sBqpn5NPs-unsplash
그것은 산 아래에서 생명의 꿈틀거림이 있고, 그것을 산의 중후함으로 지긋하게 덮어줘서 생명이 길러질 수 있도록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괘의 길러짐 혹은 기름은 올바름을 굳게 지키면 길하고[頤 貞吉], 다른 사람이 기르는 것과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는 방법(스스로 기르는 것)을 관찰해야 한다[觀頤 自求口實]고 한다. 올바름을 굳게 지키면 길할 수 있는 것은 기르는 사람과 그 방도가 올바르며 길하기 때문이다. 기르는 사람과 그 방도가 올바르며 길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관찰한다는 것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잘 살펴봐서 공감하고 핵심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사람이 기르는 것과 스스로 구하는 방식을 관찰하면, 선함과 악함 및 길함과 흉함을 볼 수 있다”(정이천 <주역>, 558)고 한다. 그러니까 선함과 악함 및 길함과 흉함을 꿰뚫어 보게 됨으로써 천지와 조화될 수 있는 마땅함과 올바름의 기르는 도를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관찰로 인해서 좋은 향기나 맛난 음식 혹은 현란한 사유와 문장에 현혹되지 않고, 길러짐 혹은 기름에서의 올바름을 굳게 지킬 수 있게 된다. 고전을 읽으면서 빼어난 사유와 화려한 문장이 주는 이미지에만 빠지기 쉽다. 그렇게 되면 고전으로부터 지혜를 얻기가 어렵다. 하지만, 담백하면서도 진솔하게 삶의 정수와 지혜에 대해 말하는 부분들을 관찰하고, 그것을 곱씹는다면 삶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좋은 음식물을 꼭꼭 씹어 우리 몸의 자양분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올해 공부를 통해서 얻은 고전을 대하는 나의 태도 변화이기도 하다. 이전까지의 고전 읽기는 취미 활동이나 지식 쌓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고전을 통해 길러지기만을 기다리는 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그에 비해, 고전을 관찰하고 곱씹어서 삶의 자양분으로 만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고전을 가지고 스스로 기르는 방도를 찾으려는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taylor-wilcox-YFsxp5BpjeM-unsplash
좋은 음식물을 꼭꼭 씹어 우리 몸의 자양분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고전에 대하는 나의 이러한 태도 변화는 이괘의 상구효(上九爻)를 고전공부의 비전으로 생각하게 했다. 이괘의 중간 네 개의 음효는 남이 자신을 길러주기를 바라는 자리이지만, 상구효는 초구효와 함께 양효로 스스로 기르고, 그러면서 남을 기를 수 있는 자리이다. 그런데 초구효는 스스로 기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리이기는 하지만, 남이 길러주기를 바라는 욕심에 동요되어 흉할 수 있는 자리이다. 그에 비해, 상구효는 기르는 자로 자신으로 말미암아 남이 길러지는[由頤] 자리이기에 그 책임이 무겁다. 남을 기르는 것에 대한 그 무거운 책임을 위태롭게[厲] 여기면 길할[吉] 수 있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롭다[利涉大川]고 했다. 즉, 그 기르는 재주와 능력을 다하여 세상의 위험과 혼란을 해결하고 조화와 안정을 이루는 큰일을 해낼 수 있으므로 이롭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상구효의 효사는 기르는 자의 ‘위태로움’과 ‘이로움’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다. ‘위태로움’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남이 길러지기 때문에 그 책임과 역할의 무거움에서 나오는 것이다. 누군가의 글에 대해서 코멘트를 할 때를 생각해보면, 그 책임의 무거움 그리고 그에 따른 위태로움을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어떤 코멘트인가에 따라서 삶 또는 글에서 새로운 길이 열리거나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르는 자의 재주와 능력은 세상에 미치게 된다. 성인이 현자를 기르고 그 현자가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치는[聖人養賢 以及萬民]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기르는 자는 세상을 향해서 코멘트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의 새로운 길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기르는 자의 역할이고, ‘이로움’이다.

santtu-perkio-wuiAOGzfU70-unsplash
그래서 기르는 자는 세상을 향해서 코멘트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기르는 자는 ‘위태로움’과 ‘이로움’이라는 무겁고 높은 책임과 역할을 수행하는 자이다. 이를 고전공부의 비전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기르는 방도를 구하며, 그것으로 남을 기르고, 세상의 새로운 길을 열고자 한다. 지금 같이 공부하고 있는 학인들에게도 같은 비전 세우기를 권하고 싶다. 그래서 ‘따로 또 같이’ 그 길을 걸어가고 싶다. 고전공부의 비전을 세운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가야 할 길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뚜벅뚜벅 고전을 곱씹으며 그 길을 걸어가는 일만이 남게 된다. 좋은 음식을 꼭꼭 씹어 신체가 길러지는 그 길, 고전을 곱씹고 곱씹어 신체를 기르는 그 길을 걸어가 보려고 한다.

0 0 vote
Article Rating
guest
0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
0
Would love your thoughts, please comment.x
()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