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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해 완

쿠바를 떠날 날이 머지않았다. 이번에는 남은 학기를 마치고 휴학 신청을 할 목적으로 온 지라, 이곳에 머무르는 기간이 10주 밖에 되지 않는다. 3학년이 된 친구들은 바퀴벌레로 가득한 병원에서 신음하고 있다. 나보고 혼자 탈출했다며 배신자라고 원망의 소리를 낸다.

나는 더 이상 수업을 듣지 않지만 그래도 매일 학교에 간다. 서류 때문이다. 쿠바의 관료주의 속에서 서류를 떼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각오는 했지만, 오… 역시 기대 이상이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스릴러 영화다. 몇 달을 기다려서 공증을 받은 학교 커리큘럼은 맞는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 또 성적표를 가져다줬더니 그날 당일 비서실에서 잘못된 서류인줄 알고 찢어버렸다. 박력이 넘친다. 비서는 다행히 찢기 전에 성적표를 공증용 서류로 바꿔놨다고 해맑게 말했으나, 그 서류에는 정작 제일 중요한 학점이 빠져있었다. 학점 계산을 해보자 그가 과목도 한 개 빠뜨렸고, 과목명을 쓰다만 것도 있다는 게 드러났다. 우리는 컴퓨터 앞에 사이좋게 앉아서 수정을 했다. 나는 이들이 언제쯤 해고될까 계산했고 말이다!

 

멀고도 가깝다

이것이 쿠바와 한국 사이의 거리다. 한국식 감각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처리와 사고방식과 처세법. 이 앞에서 내가 뒷목 잡고 쓰러지는 것은 결국 나도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내가 한국에서 정말 머나먼 곳까지 와서 살고 있다는 게 실감난다. 살사, 번쩍거리는 장신구, 끈끈한 볼키스, 뭉개지는 쿠바식 스페인어가 낯선 만큼 우리들의 속살과 속사정도 다른 것이다.

그렇지만 또 생각보다 쿠바와 한국이 가깝다고 느낄 때도 있다. 아래층에 사는 이웃 부부는 작년에 딸아이를 출산했는데, 아침마다 아버지가 아기를 안고 노래를 부르며 마당을 걸어 다닌다. 뚜뚜루뚜뚜… 아기상어 노래다. 한국에서 출시하여 전 세계에 뿌려진 명곡. 얘네 세대는 지역과 기후와 국적을 막론하고 똑같은 동요를 듣고 자라겠구나 싶다. 그리고 지난번에는 오토바이 폭주족들이 스피커 음량을 최고치로 올리고 지나가는데, 거기서 극악한 쿠바 레게똥이 아니라 청량한 한국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쏘 아임 라이릿 업 라이크 다이너마이트! 이번에 미국 빌보드에서 1위한 방탄소년단 노래다. 쿠바까지 흘러들어와 사람들의 취향을 바꾸고 있다.

가시적인 연결고리가 없다고 해서 무조건 다르다고 선을 그을 수 없다. 세계는 알게 모르게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니까 아시아 극동 출신인 나 같은 이방인도 쿠바까지 와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쿠바까지 24시간의 비행은 길고도 멀지만, 또 절대적 거리를 고려하면 짧다고도 할 수 있다. 멀고 가깝다는 개념도 결국 상대적이다.

근대의 꿈과 코로나바이러스

지금은 세계가 가깝다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코로나바이러스 덕분이다. 바이러스는 올해 내내 ‘지구촌’이 하나의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불행한 방식으로 증명하고 있다. 친구들과 까마구에이로 여행을 갔다가 중국이 우한에 병원을 짓고 있다는 뉴스를 본 게 올해 2월 초였다. 그 다음 주에 한국에서 신천지 사태가 터졌다. 이 주 뒤에는 이탈리아가, 그 다음에는 스페인이 뒤집어졌다. 쿠바가 전면봉쇄를 선언한 것은 3월이 다 지나기도 전이었다. 한국의 난리법석이 쿠바의 긴급사태로 이어지는데 6주밖에 안 걸렸다.

모두들 당혹스러워 한다. 일상을 박탈당한 일상, 살기 위해 고립을 자처해야 하는 역설, 그리고 백신이 나온다한들 팬데믹 이전의 생활로 완전히 복귀할 수 없으리라는 예감은 그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이 당혹함 저변에는 역병쯤이야 현대과학의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혹은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저개발국가의 전유물이라고 판단했던) 지난날의 오만함이 있다. 뒷북치는 꼴이긴 하지만,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토록 나이브한 정신상태로 살아올 수 있었을까 눈앞이 아찔하다. 대역병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팬데믹은 예외상황이 아니라 언제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예정사건이다. 단순히 인류가 바이러스를 ‘제거할 수 없어서’, ‘대항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역병을 번성시키는 원인이 우리가 그리워마지 않는 일상에 내재해있기 때문이다.

역병의 발생 조건은 두 가지다. 첫째는 인간의 면역계가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힘든 신종 병인이 등장하는 것이다. 둘째는 인간이 모여 살면서 병인의 감염원과 감염경로를 공유하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종에게 역병이 위협이 되기 시작한 것은 문명을 세우면서부터다. 과밀한 인구밀도는 필연적으로 환경을 오염시키고, 세균의 생존율을 높인다. 또 집단면역을 이룩하기도 어려워진다. 감염성 질환이 지속되는 데에는 약 50만 명의 인구면 충분하다. (제시카 스나이더 색스, <좋은 균, 나쁜 균>, 31쪽)

근대문명은 유례없는 역병의 파라다이스다. 이 정도의 규모로 인류가 연결되고, 또 거침없이 자연을 파괴했던 적이 있었던가? 연결과 파괴는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 이후로 500년간 달려온 근대문명의 원동력이다. 물론 콜럼버스가 꿈꿨던 미래는 팬데믹 앞에 우왕좌왕할 인류가 아니라, 스페인 왕국과 기독교인들에게 돌아가게 될 신의 영광이었다. (그는 돈키호테와 비슷한 수준의 분별력과, 돈키호테보다 훨씬 악한 심장을 가지고 신세계에 왔다.) 그러나 역사는 개인 및 집단의 꿈과는 무관하게 불연속적으로 굴러간다. 5세기 동안 온갖 드라마가 펼쳐졌고, 더 이상 유럽이 헤게모니를 독점했다고 말할 수 없는 지금, 지구 각지가 하나의 시스템 속에 맹렬하게 연결되었다는 결과만 남았다. 그 동선을 따라서 자연 파괴와 자원 착취는 예외 없이 진행되었다.

이 연결의 연장선상에서 우리가 산다. 국제 네트워크 바깥에서는 ‘한국’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다. 나의 행보 역시 그렇다. 쿠바를 통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유럽이 스스로 각성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헤집고, 그 영향력을 극동까지 퍼뜨리는데 사백 년이 걸렸다. 그 후 한반도에서 태어난 여자가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끼고 쿠바에 공부하러 오는 날이 오기까지 백 년이 더 걸렸다. 이 광활한 동선이 그려지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철도가 놓이고, 석유가 파헤쳐지고, 인간과 동물의 피가 흘렀을지 상상도 안 간다.

따라서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가 서 있는 시공간의 주소다. Covid-19의 마지막 RNA 분자조각이 호모 사피엔스 체내에서 제거되는 순간에도 ‘팬데믹’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시대의 상징으로 남을 것이다. 바이러스의 변종 속도는 파괴당한 자연의 수모를, 전파 속도는 전 세계를 연결한 테크놀로지의 과용과 무용을 드러낸다. 근대를 움직이는 두 가지 축이 바이러스 속에 살아있다. 그런 한 역병은 언제든지 되돌아온다. 백신의 개발속도보다 병인의 돌연변이 속도가 더 빠른 것은 자명해 보인다.

팬데믹 속에서도 호모 사피엔스의 존재방식은 동일하다. 예전처럼 살고 싶은 욕구도, 자연 파괴도 멈춘 적이 없다. 2020년 한 해에 버려진 일회용쓰레기의 양은 불쌍한 북극곰을 앞세우는 환경캠페인의 입을 틀어막는 수준이다. 녹는 얼음 위에 서 있는 것은 북극곰뿐만 아니다. 기후변화는 남반구에서 생존의 문제다. 올해 중남미 지역을 강타한 태풍이 서른 개가 넘는다. 쿠바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태풍의 영향권 아래 우기가 더 오래 지속되면서 모기가 극성을 부렸다. 덕분에 뎅기열과 지카열이 다시 창궐하고 있다. 이것이 ‘코로나바이러스’와 다를 게 뭘까? 팬데믹의 사람들은 자기 지역이 아닌 곳에서 발생한 바이러스 때문에 고통 받는다. 마찬가지로 열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없는 기후변화로 고통 받는다. 변변한 가전제품도 없고, 야경도 없고, 모든 물건을 재활용하려고 애쓰는 쿠바인 같은 사람들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바이러스는 일면 평등하다 하겠다.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다 같이 망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직시하게 해주니 말이다. 근대가 꾼 꿈은 결국 대역병이 아니었을까? 다 같이 연결되고, 다 같이 파괴되고, 다 같이 감염되기.

연결의 딜레마

연결에 대한 불안과 피로는 팬데믹 이전부터 존재했다. 2016년 여름, 영국은 느닷없이 유럽연합을 탈퇴했다. 세계가 뒤집어졌다. 탈퇴에 찬성한 영국인들은 아프리카와 중동 출신의 이민자들을 막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같은 해, 트럼프는 브렉티스가 일회성 일탈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 이민자들을 모욕했고, 그들의 다갈색 육체와 스페인어를 깎아내렸고,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민자. 전 세계가 연결되어 있음을 몸으로 증명하는 또 다른 존재들이다. 사회의 변이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보면 발 달린 ‘바이러스’인 셈이다. (물론 바이러스가 반드시 숙주에 해를 입히는 것은 아니다. 숙주의 DNA에 합류해서 유전자풀을 풍요롭게 만들기도 한다.) 이들을 가로막을 현실적 근거는 약하다. 세계 경제 안에서 밥 먹고 똥 싸면서 이민자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백치의 환상이다. 자본의 흐름이 국경을 넘나들면서 지역 경제를 망가뜨리는데, 사람들이라고 그 흐름을 안 따라가겠는가? 경제를 살려야한다는 이유로 진짜 바이러스조차 완전히 차단할 수 없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외부에 적응해야 한다는 스트레스와 분열에 대한 공포도 그만큼 현실적이다. 팬데믹과 함께 퍼지는 중국인 혐오, 제주도에 예멘 난민들이 상륙했을 때 일어난 반응은 집단 히스테리에 가까웠다.

이것은 신체적 반응이다. 언어가 개입하기 이전의 단계다. 생존을 위협받는 불안, 접촉 기피, 격리 욕구, 모두 생존 메커니즘에 새겨진 오래된 병의 기억이다. 균질적으로 통합된 세계 경제 시스템을 따라 타자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이들이 품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병인’에 대한 두려움이 올라온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생활 리듬을 어그러뜨리는 것은 모두 일종의 병이 아닌가? 이들을 내 영토에 완벽히 동일화시킬 수 없다면 아예 제거하고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른 기억도 있다. 근대는 세계인들을 쉴 새 없이 뒤섞어왔다. 경직되고 폭력적인 관계가 강요되었지만, 결국 피와 살이 섞이고 정신세계가 섞이면서 경계인들이 탄생했다. 역사 속에 빛나는 사상과 획기적인 발상을 남긴 것은 이들이었다. 면역계가 다양한 외부물질과 접촉해야만 역량이 커지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광활한 연결망 속에는 두 가지 경향이 공존한다. 사피엔스가 섞여 살수록, 사회의 면역계는 풍성해지고 강해질 가능성과 병에 걸릴 가능성이 동시에 커진다. 팬데믹을 피할 수 없듯이 이 딜레마도 피할 수가 없다. 이민의 장벽이 높다는 한국도 종국에는 여기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문제의 시발점과 해결점이 ‘몸’의 층위에서 교차한다. 근대문명 안에서 태어난 바이러스는 인체의 면역계에 광범위하게 접속한다. 결국 우리는 면역계가 ‘정신줄’을 놓지 않고 (면역계의 스텝이 꼬이면 카이토신 폭풍 같은 위기가 발생한다) 이 외부손님을 무사히 겪어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점점 긴밀해지는 세계와 잦은 외부접촉은 몸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거부가 혐오로 변환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렇다면 다양성의 윤리를 논하기 이전에, 우선 다양성을 소화할 수 있는 신체가 훈련되어야 한다. 몸에 빚지지 못한 말은 흩어지는 메아리일 뿐이다.

거부가 혐오로 변환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렇다면 다양성의 윤리를 논하기 이전에, 우선 다양성을 소화할 수 있는 신체가 훈련되어야 한다.

아메리카의 앞서가는 신체

아메리카 대륙은 신체 훈련을 가장 먼저 시작한 땅이다. 지금도 모든 인종이 뒤섞여 살아가는 유일한 장소다. 이 땅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신체는 새로운 존재방식을 경험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세계 각지에서 온 개체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섞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길들여지지 않는 자연에 기대어 살았다. 아메리카가 배태한 개념들(자유, 독립, 민주주의, 반인종주의, 혁명, 기타 등등)은 이런 형형색색의 몸들에게 빚지고 있다. 나와 피부를 맞대고 체온을 나누며 땀을 흘리는, 나와 다르게 생겼으나 실은 다르지 않은 사피엔스의 존재감을 느끼지 않고서 어떻게 ‘다양성’의 가치를 이해하겠는가.

나는 쿠바에서 이런 몸들에게 둘러싸여있다. 쿠바 청년의 얼굴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원주민이 같이 녹아있다. 생김새가 다른 친구를 끌어안고 형제라고 부르는데 거리낌이 없다. 아, 이것은 지금 시대조건에서 가장 건강할 수 있는 유형의 신체가 아닌가? 이 생기를 지역의 특색으로 국한시키기에는 너무 아깝다. 그들이 분열적인 환경에 잘 적응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이점도 있다. 신체의 자존감을 두텁게 쌓아올릴 수 있다는 점이다.

신체의 자존감이라는 표현이 이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체 역시 마음처럼 자존감을 쌓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신체를 자동으로 ‘소유’하는 게 아니다. 습관, 태도, 역량, 상징을 통해 신체와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비로소 존재를 실감한다. 그러나 근대적 배치 속에서 이 관계는 몹시 얄팍하다. 자연이 착취 가능한 자원으로밖에 취급되지 않는다면, 자연의 일부인 육체가 어떻게 대접받겠는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강관리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외모관리 이상이 되기 어렵다. 그런데 쿠바인들은 세 가지 방법으로 이 함정에서 벗어난다. 타인과의 접촉, 자연과의 조우, 신체의 쓰임새. 타인의 육체와 부대끼면서 역으로 자기 육체를 세세하게 실감하고, 인간의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대자연을 보며 물질의 신성함을 소박한 수준에서 이해한다. 또 신체의 다양한 쓰임새를 개발한다. 힘겨운 일상을 지탱하는 육체노동, 목청껏 뽑아내는 노래, 어디서든 흥을 타는 춤사위가 대표적이다.

신체의 존재감이 두터워지면 우울증은 저절로 사라진다. 외부접촉이 늘어나더라도 쉽게 자기를 찾고 중심을 잡는다. 이것 자체가 문제의 해결은 아니지만, 해결을 찾기 위한 좋은 시작이 된다. 뉴욕과 아바나에 살면서 나는 어떤 사상에 크게 매력을 느낀 적이 없다. 그러나 뉴요커와 아바네로의 풍성한 신체성은 나를 크게 흔든다. 아시아가 근대 안에서 단절과 계승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탐색한다면, 아메리카는 자아와 타아의 경계를 ‘열린 신체’로 부수고 들어가는 듯하다. 쿠바 대중가요 ‘관타나메라(Guantanamera)’의 가사로 유명한 쿠바 시인 호세 마르티의 시에는 다음 구절이 있다.

 

나는 모든 곳에서 왔고 (Yo vengo de todas partes)

모든 곳을 향해 간다네 (Y hacia todas partes voy)

― <나는 신실한 사람(Yo soy un hombre sincero)> 중에서

 

마르티는 유럽이 뇌라면 아메리카는 심장이라고 했다. 세상 “모든 곳”을 품은 고향 사람들에게서 유럽인에게는 없는 생의 힘을 본 것이다. 재미있게도 그는 그가 ‘우리 아메리카(Nuestra America)’라고 부르는 세계의 심장에서 미국은 제외한다. 미국인들은 자기가 사는 땅과 교감하지 못하고 뿌리를 내리지 못해, 돈에 얽매여 떠도는 불쌍한 유령처럼 산다는 것이다. 그의 예언이 적중한 것일까, 요즘 미국의 매력은 열심히 퇴행하고 있다.

한국은 어떨까? 유럽의 국가들 못지않은 선진국이 되었는데, 왜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병적이고 변태적인 사건사고들이 일어날까. 우리가 잊은 것은 몸이다. 신체의 존재감을 두텁게 쌓아볼 기회가 전무하다시피 하다. 얄팍한 신체로는 분열적으로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중심을 잡을 수 없다.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세계가 움직이는 시대다. 내 나라, 내 고향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아도 이민자가 될 수 있다. 변이를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생기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아메리카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메리카인이 “모든 곳에서 오고” 또 “모든 곳을 향해 가는” 존재들이라면, 그들 사이에 우리 몸을 눕힐 자리도 있을 테다.

세계청년은 어디로 가는가

내 친구들은 열린 신체를 지닌 멋진 청년들이다. 카리브해와 아프리카 사하라 남쪽 출신인 이들은 높은 신체적 자존감을 지녔고, 덩달아 마음의 자존감도 높다. 배울 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이 꿈꾸는 미래는 한국 청년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충격적일 정도로 동질성을 띤다. 가족을 부양할 돈을 벌고 싶다. 그러려면 번듯한 직업이 있어야 한다. 집, 자동차, 첨단 기기도 있어야 한다. 또 공정성과 효율성을 보장해주는 정부도 필요하다. 그러나 고국의 실제 상황은 심난할 뿐이다. 가난과 부패와 폭력이 즐비하다. 이번 생에는 좀처럼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따라서 이들 중 누구도 쿠바에서 졸업한 후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모두들 유럽을 바라본다. 이들의 꿈은 이민자다.

친구들의 이야기는 세계청년들이 따르는 이정표다. 기독교의 신이 자신에게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할 사명을 넘겼다고 말했던 콜럼버스를 믿는 자는 이제 아무도 없다. 대신 오늘날의 세계는 자본-상품-테크놀로지라는 초일신교에 사로잡혔다. 자본주의에 의해 자급자족의 전선이 붕괴되면 사람들은 상품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정보-지식의 네트워크가 온라인에 모두 흡수된다면 청년들은 밥을 굶더라도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살 수밖에 없다.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는 전방위적인 압력 속에서, 청년들의 꿈과 계획은 하나의 트랙으로 좁혀지고 흡수된다. 역시 우리는 다 같이 망하게 되는 걸까? 인도 사람들 모두가 미국인과 같은 생활방식을 택한다면 자원고갈 때문에 지구가 몇 십 개라도 부족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사치품이 필수품으로 바뀌는 게 역사의 법칙이라는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지구상 모든 이들이 번듯한 집에 세탁기를 놓고 자동차를 굴리며 이 년에 한 번씩 스마트폰을 바꾸겠다는 꿈만 꾸면 된다. 이 정도면 지구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망하는 데 충분할 것 같다.

팬데믹에는 중요한 역설이 숨어있다. 연결 때문에 전염이 발생한다 해도, 연결을 끊는 것으로서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것. 고립은 바이러스를 죽일 수는 있어도 숙주의 생존까지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적절한 조치의 답은 하나다. 알맞은 거리두기(분리)와 면역력 증강(섞임)을 동시에 진행하기. 근치(根治)를 생각하면 고립은 더더욱 선택지가 아니다. 각 지역이 전부 방역에 협조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연결이냐 고립이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이미 촘촘하게 연결되어버린 생존의 조건을 어떻게 근본적 폭력 속에서 구제해내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연결망 속에 다른 꿈들을 흘려보내야 한다. 바이러스를 마크하는 항체처럼 말이다. 우리가 누리는 ”현대 사피엔스가 이룩한 전례 없는 성취”는 “다른 모든 동물의 운명을 깡그리 무시할 때만 (…) 자축할 수 있”는 피의 제단이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535쪽) 나카자와 신이치의 개념을 빌리자면 전체를 보는 시야와 균형감각을 상실해버린 비대칭성이다. 그는 대칭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일신교의 존재방식을 거부할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파고들어 그 속에서 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 같이 테크놀로지로 연결되고, 다 같이 게으른 신체의 습관을 파괴하며, 다 같이 새로운 윤리에 감염되기. 불가능할까?

더 나은 삶을 쫓는 친구들이 시선 끝에는 동아시아가 있다. 첨단 테크놀로지를 대표하는 장소가 이제는 중국, 일본, 한국이 되었다. 그들은 발전된 국가에서 첨단의 삶을 사는 기분이 어떠냐고 종종 내게 묻곤 한다. 그런데 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이뿐만이 아니다. 아시아에만 있는 윤리, 철학, 절제의 미덕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표한다. 아! 이번에도 친구들은 내게 가르침을 준다. 아시아는 최신 테크놀로지와 오래된 영성이 교차하는 장소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를 윤리에 연결시키는 잠재성도 이곳에 숨어있지 않을까. 유럽이 뇌이고 아메리카가 심장이라면 아시아는 비전이 될 수 있다. 모두와 가까운 사이가 될 수밖에 없는 시기, 우리는 서로에게 각자의 최선을 선물해주면 된다.

그렇게 나는 쿠바에서 다시 한국으로 향한다. 아메리카가 선물해준 건강한 신체의 경험을 가지고, 첨단의 테크놀로지가 난무한 땅으로. 또 다른 공부에 대한 고민과 함께.

 

쿠바에서 한국으로

며칠 전에 우체국에 가서 한국으로 책을 부쳤다. 돌아가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그런데 내가 잠시 미쳤었는지, 우체국에서 박스를 팔 거라고 생각하고는 책만 달랑 들고 갔다. 박스? 당연히 없었다. 한국도 아닌 쿠바에서 팔 리가 있나. 결국 나는 박스를 구걸하러 길거리로 나갔다. 포장마차 아줌마, 약사 언니, 방앗간 할아버지가 이 얼빠진 외국인을 불쌍히 여기어 귀한 박스를 하사하셨다.

방앗간이 마지막 장소였다. 박스 속에서 바퀴벌레가 우르르 튀어나오는 바람에 작은 소동이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옆에 있던 청년에게 나 대신 박스 좀 정리하라고 시켰다. 그리고는 나를 자기 앞에 세우더니, 생뚱맞게 시를 읊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자신이 길거리 시인이란다. 제목은 <의사>. 내 수준의 스페인어로도 알아들을 수 있는 단조로운 시였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이미 내게 둘도 없는 은인이었으므로 나는 열렬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시 낭송이 끝나자 할아버지는 쑥스러웠는지 늙은이의 주저리였다고 사족을 덧붙였다. 그리고 어떤 곳에 가서 살든 사람이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했다.

이들의 도움 덕분에 내 책은 지구를 돌아 한국까지 도착할 것이다. 책들을 볼 때마다 할아버지의 시가 떠오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멀지만 또 가까운 우리들 사이, 그 사이.

멀지만 또 가까운 우리들 사이, 그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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