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영(남산강학원 동고동락)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호연지기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기다. 일상을 올바로 살면 길러지는데, 올바름을 해치지 않으면 호연지기가 하늘과 땅 사이를 꽉 채울 수 있다. 그것은 마음이 의와 짝하고 자연의 이치와 함께할 때이니, 그렇지 못하면 곧 쪼그라들고 만다. 호연지기는 내 안에 의가 쌓여서 생겨나는 것이지, 따로 밖에 있는 의를 가져와 취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제 마음에 꺼림칙하면 바로 쪼그라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자는 애당초 의를 바로 안 적이 없다’고 한 터다. 그는 의가 밖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드시 호연지기 기르기를 일로 삼되 집착하지 말고,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아야 한다.

「공손추」 (하), 『맹자, 마음의 정치학 1』, 배병삼 옮기고 풀어 씀, 사계절, 291~292쪽

그것은 마음이 의와 짝하고 자연의 이치와 함께할 때이니,

그렇지 못하면 곧 쪼그라들고 만다.

‘의(義)와 짝하고 자연의 이치(道)와 함께할 때’ 호연지기는 올곧게 길러진다. 의, 도와 함께한다고 하니 자칫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진부한 얘기처럼 들린다. 호연지기는 옳음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옳음은 밖에서 구하는 객관적인 도덕과는 다르다. 스스로가 세운 도덕이자 원칙 같은 것이다. 스스로 돌아보아 떳떳함에서 나오는 것. 그래서 떳떳하지 못할 때는 위축되고 쪼그라든다.

호연지기는 내 안에 의가 쌓여서 생겨나는 것이지,

따로 밖에 있는 의를 가져와 취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제 마음에 꺼림칙하면 바로 쪼그라드는 것이다.

호연지기는 ‘내 안에 의가 쌓여서 생겨나는 것’이다. ‘내 안에 의가 쌓여서’는 ‘집의(集義)’의 번역이다. 그러니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의가 쌓여서’가 맞다. 맹자는 의(義)가 마음 바깥에 있다고 보는 고자(告子) 등과 날카롭게 대립했기 때문에 이 대목에서 ‘안에’라는 부분을 강조한 듯하다. 하지만 맹자가 의를 바깥에 있지 않다고 한 것을 곧바로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마음에 안팎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의가 쌓여서’라는 말에는 시간성이 담겨있다. 호연지기는 어느 날 갑자기 습격하듯이, 어쩌다 한번 했다고 되는 게 아니다. 시간을 두고 ‘쌓아야’ 한다는 의미이면서 ‘매번 행하는’ 것으로써 길러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의(義)의 지속성과 항상성에 관한 얘기다. 지속할 수 있는 힘은 싫증 내지 않고 계속할 때 얻을 수 있다. 이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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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글쓰기를 준비할 때다. ‘그럼 여기에서 대인과 소인의 차이점은 뭔가요?’라고 문샘이 질문하셨다. ‘또 인의와 리죠 뭐’라고 성의 없게 대답했다. 『맹자』의 모든 답은 ‘인의(仁義)와 리(利)’의 구도로 수렴되는 듯해 살짝 지루하게 느껴졌었나 보다. 샘은 똑같은 인의와 리라도 다르게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양혜왕, 제선왕에게 말하는 인의와 리, 지금 호연지기를 읽을 때의 인의와 리, 그리고 내 삶에서의 인의와 리는 각각 다르지 않겠는가? 그 다름을 찾아 정확하게 언어화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어느새 또다시 정답을 찾듯이, 분석하듯이 『맹자』를 읽고 있었다. 같은 코멘트를 받는 것은 왜 지루하지 않은지? 쩝!

생각해보니 문샘은 양명(陽明)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마치 지금 처음 안 것처럼, 처음 깨달은 것처럼 말씀하신다. 어떻게 매번 저렇게 『전습록』을 신나게 읽으실까? 의아했었다. 샘은 그 매번이 늘 새로우신 거다! 나는 맹자를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그래서 나는 ‘고자는 애당초 의를 바로 안 적이 없다’고 한 터다.

그는 의가 밖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마음과 기의 관계에 대해 맹자와 의견을 달리한 고자에 대한 반박이다. 앞에서 말했듯 고자는 의로움의 기준이 밖에 있다고 본 것이고, 맹자는 우리의 마음이 곧 옳음의 기준이라고 말하고 있다.

반드시 호연지기 기르기를 일로 삼되

‘일로 삼되(必有事焉)’는 일상 속에서 혹은 사건을 통해 끊임없이 길러야 한다는 의미다. 호연지기를 배웠으면 호연해질 일이다. 그래야 호연지기를 배웠다고 할 수 있다. 맹자를 공부한다는 것은 맹자처럼 살고 싶어진다는 뜻이다.

『맹자』에서 호연지기가 나오는 맥락은 이러하다. 제자 공손추가 맹자에게 묻는다. 세속적인 욕망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냐고. 맹자는 세 가지 유형의 ‘용기’에 대해서 말해준다. ‘부동심(不動心)’은 용기를 내는 문제였고 그 용기가 바로 호연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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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루로 돌아가 보자. 맹자-글쓰기에 대한 문샘의 피드백이 진행되는 상황이다. 호연지기를 읽었는데, 그럼 문영샘은 어떤 용기를 내셨어요?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저자가 말한 의미를 파악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된다. 나에 대한 질문을 길어내야 한다.

용기는 위험을 수반한다. 용기를 낸다는 것은 기존의 습관이나 삶으로부터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편하고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탈주. 나는 맹자의 어떤 점이 불편한가? 맹자-되기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수다스러움’이다. 강한 어조, 확신에 찬 말, 남의 마이크까지 뺏어와 기어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고집스런 의지가 매력적이면서도 이질적이라 버거웠다. 『맹자』를 읽고 글을 쓰면서도 스스로의 변화를 일으켜내지 못하니 ‘말과 행동이 제 마음에 꺼림칙하면서 바로 쪼그라든다’.

지난 번 ‘지언(知言)’편에 이어 ‘말’이 계속 화두로 남는다. 나의 호연지기는 ‘수다스러워질 용기’다. 밥 먹고 산책하고 차를 마시면서 의식적으로라도 맹자를 떠올리고 한마디라도 그에 대해 말해보기. 나의 공부 숙제다.

집착하지 말고,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아야 한다.

‘집착하지 말고’는 ‘물정(勿正)’에 대한 해석이다. ‘(억지로) 바로잡으려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인위적으로 하려고도, 결과에 집착하지도, 결과를 예단하지도 말아야 한다.

호연지기 길러야 한다는 것을 잊지도 그렇다고 빨리 이루고자 조장(助長)해서도 안 된다. 송나라에 싹이 자라지 않는 것을 근심해 그 싹을 뽑은 자가 있었다. 싹을 위해 피곤할 만큼 뭔가를 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도와준 게 아니라 말라 죽게 만들었다. 이는 무익할 뿐 아니라 해까지 끼치게 된다. 호연지기에 대한 맹자 어르신의 마지막 당부 말씀이다. 집착하지도 잊지도 조장하지도 말고, 그 사이에서 적중함(中)을 찾는 일. 마치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롭다. 조금만 어긋나도 쓰러지거나 베일 수 있으니 말이다. 계속 공부해야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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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하지도 잊지도 조장하지도 말고, 그 사이에서 적중함(中)을 찾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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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민
소민
17 days ago

맹선생이 말하는 “의”에 대해 하나하나 분석해주셔서 멀게만 느껴지던 개념이 훨씬 와닿는 것 같아요^^ 

저도 매일 반복되는 것 같은 일상에서 “새로움”을 느끼기 위해 더 텍스트를 읽고 정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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