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상 헌(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신과의 결별을 선언한 니체! 삶은 형이상학적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니체! 그는 이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철학’을 시작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니체의 중기 저작을 대표하면서 양적으로도 방대하다. 번역본(책세상)을 기준으로 총 884쪽(1, 2권), 총 1,415편의 잠언이 수록되어 있다. 이 방대한 저술을 시작하면서 니체는 맨 앞 장에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있다. ‘최초와 최후의 사물’이라! 니체는 이 제목으로 결국 ‘삶의 시작과 끝’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이 장에서 삶이란 형이상학적인 신을 갈구하는 것도, 이데아를 추구하는 것도 아님을 비판한 후, 마지막 부분에서 삶의 세 가지 ‘불가피함’을 말한다. ‘비논리적인 것’, ‘불공정함’, ‘삶에 대한 오류’가 그것이다.

불가피함이 주도하는 삶

니체가 직면한 삶의 세 가지 불가피함! 비논리적인 것은 불가피하다.” “불공정함은 불가피하다.” “삶에 대한 오류는 삶을 위해 불가피하다.” 이 메시지는 신과 이성을 버린 자리를 대체할 수 있을까? 불가피함을 인식하는 것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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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논리적인 것

비논리적인 것은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에 그리고 대체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에 상당히 깊이 파고들어 가 있어서, 이들 아름다운 것들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지 않고는 비논리적인 것을 퇴치할 수 없다. () 가장 이성적인 인간도 때로는 다시 본성을, 즉 만물에 대한 자신의 비논리적 기본 입장을 필요로 한다.(니체, 인간적 Ⅰ』, 책세상, 54-55)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다.” 우리가 가장 많이 들어 아주 익숙한 말이다. 하지만 니체는 이 익숙한 것의 한계를 보는 것으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다. 이성은 라틴어로 ‘Ratio’(라치오)라고 한다. 그 의미는 계산 능력, 추리 능력 등이다. 인간은 이것으로 못하는 것이 없다. 머리로 계산하고 추리해보면 안되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추리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간은 신도 만들고, 천국도 만들고, 지옥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이성을 가진 존재이니, 이성을 사용해서 모든 인간을 천국에 가둘 수도, 지옥에 가둘 수도 있다. 단 이것은 인간의 몸이 아닌 몸과 분리된 이성에 국한된다. 논리적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논리가 모든 것, 즉 인간의 정열, 언어, 예술, 종교마저 지배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애초에 이들은 논리의 세계에 갇혀 있을 수 없는 것들이다. 논리에 갇힌 인간의 정열, 언어, 예술, 종교는 그만큼 왜소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영원히 논리에 가둘 수는 없다. 인간의 삶은 이성보다, 비이성 혹은 비논리적인 것이 주도한다는 것이 니체의 입장이다. 니체는 인간을 이성 혹은 논리가 지배하는 존재가 아닌 몸이 주도하는 존재로 재설정한다. 그는 논리가 지배하는 이성을 ‘작은 이성’이라 이름 붙이고,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큰 이성’이라 이름 붙인다. 여기에서 니체의 ‘생철학’이 탄생한다. 니체는 ‘자신의 몸을 가지고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거나 머물러 만족하지 않는 인간’, ‘영원한 자기극복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삶을 위한 철학을 한 것이다. 이렇게 니체의 철학은 머리에서 몸으로 인식을 옮겨오면서 시작된다. 여기에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이 시작된다. 니체는 ‘가장 이성적인 인간도 삶을 위해서는 자신의 본성을, 다시 말해 자신의 비논리적 기본 입장’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논리라는 작은 이성을 극복하고, 자신의 몸이라는 큰 이성에 토대를 둠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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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영원히 논리에 가둘 수는 없다.

불공정함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겪은 경험은 총체적 평가를 위한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할 만큼 완전할 수는 없다 ; 모든 평가는 성급하며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재는 척도, 즉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코 불변의 크기를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분위기와 동요에 휩쓸리기도 한다.(니체, 위의 책, 55)

인간은 누구나 남을 평가하고 자기도 평가를 당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기가 하는 평가는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자기가 당하는 평가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편견이 개입되어 부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내가 하는 평가는 늘 옳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과거 학교에 있을 때, 내가 한번 평가한 점수는 내가 잘못 옮겨적은 것이 아닌 경우에는 절대 수정해 주지 않았다. 평가는 가르치는 자의 고유한 권한이라는 이유에서다. 친구들과 의견이 맞지 않은 경우, 혹은 결혼 후 아내와 자주 싸우는 경우도 이유는 비슷하다. 각자 서로가 한 판단이 옳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에서 서로 상대가 한 판단은 아무리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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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해 우리가 행하는 온갖 평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신이 세상을 보는 것은 객관적이고 공정하며, 남들이 세상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주관적이고 공정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때로는 자신의 평가가 옳다고 주장하기 위해 절대적인 어떤 권위에 의지하기도 한다. 어른이, 선생님이, 혹은 어떤 전문가 혹은 권위자를 끌어와 자신의 판단이 옳음을 관철하고자 한다. 그 극단은 아마도 신과 이데아일 것이다. 하지만 이 습성이 우리를 왜소한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반면 니체 철학의 핵심은 인간을 강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니체는 그 출발점으로 인간의 삶은 ‘불공정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직시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본인은 공정하다고 믿지만 모든 평가는 애초에 공정할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이 처한 현실이다. 우리의 평가는 절대 전체를 다 볼 수 없으며, 언제나 성급하고, 객관적인 척도 같은 것을 가질 수 없다. 또한 나의 감정에 따라 평가는 늘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생각을 바꾸어 내가 세상에 대해 행하는 평가이든, 세상이 나에 대해 내리는 평가이든 그것은 모두 ‘불공정함’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피할 수 없는 ‘불공정함’을 아는 것! 이것이 삶에 눈뜨기 시작했다는 단서이다.

삶에 대한 오류

인간은 누구나 보편적인 삶이 아니라 삶의 제한된 부분만을 주시한다. () 모든 탈개인적인 것은 그들에게 전혀 인지되지 못하든지 아니면 기껏해야 희미한 그림자로 인지될 뿐이다.(니체, 위의 책, 56-57)

인간은 오랫동안 온전한 신을 갈구해 왔다. 인간은 오랫동안 완벽한 이성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계산하고 추리하려 했다. 그런데 애초에 이것이 가능한 것이었을까? 니체의 답은? 아니오!” 그렇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삶’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2,000년 이상 신과 이성에 의존해 보편적인 안목을 갖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살아가려 했다는 것이 니체의 비판이다. 오늘 우리들 또한 교육을 잘 받으면 누구나 보편적인 인식을 할 수 있고, 모두가 이를 공유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배우고 가르치고 있다. 모두가 개인을 넘어서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 개인 너머에는 각자의 공동체든, 국가든, 세계든 그 무엇이 있다고 말한다. ‘사회성 교육’, ‘시민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현대 사회의 특성이다. 니체 이전에는 교회가, 니체 이후에는 학교가 이 기능을 수행하는 전담 기구였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기도하고 배우면, 학교를 열심히 다니고 공부하면 이 덕목을 잘 익히고 잘 살아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각자가 속한 사회에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탈개인화된 인간으로 성숙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니체는 인간은 그럴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개구리의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개구리가 우물에서 나온다고 해도 그는 세상을 개구리의 눈으로밖에 볼 수 없는 한계를 태생적으로 가지듯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도 탈개인적인 것을 인식한다 해도 기껏 희미한 그림자들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근본적으로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애써봐야 인간은 자신의 관점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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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열심히 다니고 공부하면 이 덕목을 잘 익히고 잘 살아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불가피함에 눈뜬 이후

‘신을 갈구하는 인간’, ‘이데아를 찾아 헤매는 인간’이 아닌 ‘비논리적’이고, ‘불공정’하며, ‘오류’가 우리 삶을 주도한다는 것을 깨달은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혹시 더 노예적인 삶을 살지나 않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사람들은 신과 이성을 버리면 인간은 너무나 왜소해질 줄 알았다. 또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줄 알았다. 하지만 니체가 제시한 삶의 ‘불가피함’에 눈뜨는 순간 삶은 결코 왜소하지 않고, 낭떠러지도 아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 니체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다. ‘불가피함’이라는 그 자체가 내가 살아가는 이유로 바뀐다. 절대적인 신이 없기에 나의 삶은 내가 사유하고 내가 만들어가야 한다. 이상적인 이데아가 없기에 오늘 내 삶을 위해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삶에서 인간은 이제 내면에서 솟아나는 열정과 충동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힘을 갖게 된다. 그동안 객관적이고 공정하다는 믿음에 갇혀 하나의 기준만을 제시하고 순위를 매기는 일에 혈안이 된 공부와 일이 아니라, 진정 삶이 필요로 하는 능력은 너무나 다양하고 변화하며, 또 우연적임을 알게 된다. 모두의 삶을 이끌어 갈 보편적 원칙을 상상하는 대신, 각자의 변화하는 삶의 관점에 따라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임을 알고 이를 하나하나 일구면서 살아가는 힘을 갖게 된다.

이제 다시 물어보자. 얼마나 많은 다른 삶이 보이는가? 이를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다시 배워야 하는가? 삶에 눈뜬 니체! 그가 처음 배운 것은 삶이란 절대적인 그 무엇으로 한 방에 모든 것이 간파되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니체가 찾은 삶은 ‘불가피함’이 주도하는 세상이고 삶이었다. 니체는 말하지 않았는가. “삶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놓았다!”고. 이 행운은 자신의 삶을 논리와 공정, 보편적인 어떤 것이 아닌 ‘불가피함’에 올려놓을 용기가 있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다. 불가피한 것들은 우리가 머리 속으로 그린 신이나 이성에 있지 않다. 그것은 삶이라는 거대한 대지로 걸어 나올 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이 강을 건널 용기를 낼 수 있는가? 용기가 없다면 아직 우리는 그 무엇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 언제까지? 모든 것을 질투와 불만 없이 포기할 수 있을 때(니체, 『위의 책』, 「안정을 위하여」, 59)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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