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사랑하라, 흐르게 함으로써 -2)

김석영 (남산강학원 청년스폐셜)

열정적인 프로 불만러

얼마 전,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마침 전날 저녁, 나의 ‘사랑하는 능력’이 요즘 저하됐다는 생각이 들며 중요한 숙제를 안고 있는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날 연인과의 대화에서 ‘너의 문제 제기 방식은 문제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요새 나는 연인에게 불만이 많았다. 이 친구는 나에게 장난은 치지만 대화는 붙이지 않는 것 같고, 항상 다른 일들로 바빠 보였다. 나는 우리의 관계가 충분히 깊지 않게 느껴져 답답했다. 그래서 ‘이건 아닌 거 같아’, 하는 말들을 많이 했다. 뭐가 문제인지 몰라 그때그때의 느낌들을 더듬는 수준으로 중언부언. 하지만 돌이켜 보면 사실 내게 진짜 문제, 진짜 바꾸고 싶었던 것은 이런 문제 제기는 늘 나만 하고 앉아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은 물었다. 너는 우리 사이에 불만이 없냐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느껴지냐고. 내 딴엔 나름 이제야 진짜 문제를 찾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 왈,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내용은 수긍이 가지만 그게 늘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불만을 품은 방식이라는 게 자기에겐 문제라는 것이다. 나는 벙찌고 말았다. 나는 언제나 이 관계를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들을 하는 건데? 그러니까 내가 불만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가 여기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는, 즉 더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게 아닌가? 헌데 이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내게 ‘문제제기가 많다!’고 문제를 제기하다니! ……. 그런데 이상하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caricature-4804618_640

내겐 너무 무용한 당신, 웬수!

이 불만들은 다 어디서 생기는 걸까? 가끔 연인을 보면 “웬수…!”라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다. 물론 속으로는 더 자주 했고 말이다. 주변을 보면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애인이 아니라 웬수, 남편이 아니라 웬수라는 말은 많이도 들린다. 참 이상하다. 분명 처음에는 서로가 있다는 것 자체로 좋아 연애를 시작하고, 서로로부터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듯한 힘을 얻곤 했을 텐데 말이다. 이것은 사랑이 식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나도 가끔 이 연애의 좋았던 때를 생각하며 사랑을 더 오래 지속할 수 없는 내 능력을 탓하곤 했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은 이것을 ‘지속’의 문제로 진단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사랑이 아름답게 시작했다 어느 순간 변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우리에겐 사랑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병증, ‘자아도취’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적 방향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만을 현실로서 경험하는 방향이다. 반면 외부 세계의 현상은 그 자체로서는 현실성이 없고 오직 이러한 현상이 자아도취적 인간에게 유익한가 위험한가에 따라 경험된다. 자아도취의 반대 극은 객관성이다. 이것은 사람들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고, 이러한 객관적 대상을 자신의 욕망과 공포에 의해 형성된 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2019, p.169

그가 말하는 자아도취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자신의 매력에 빠져 있거나, 자신이 매력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것이 아니다. 자아도취적 인간은,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객관성이 떨어지는 것은 맞다. 그는 외부의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익한가 위험한가’라는 기준으로 스토리를 구성하고 받아들인다. 사건들을 바라보면서 ‘저건 내게 유익해’, ‘저건 내게 위험해’라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의 눈에는 모든 펼쳐지는 일들이 자신의 흥미, 욕구, 공포에 기반하여 걸러져 들어온다.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유익해 보이거나 위험해 보이는 것으로 읽어낼 가능성이 있는 것들만, 그렇게 해석되며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극단적이지 않은 자아도취의 예시로 프롬은 이런 것을 든다. ‘자기가 어린 시절에 쌓아올린 빛나는 기사에 대한 환상을 만족시켜주지 못한다고 해서 남편을 무능하고 우둔하다고 생각하는 아내(같은 책, p.171)’!

fantasy-4825525_640

어쩌면 나의 불만도 이렇게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닐까? 나의 욕구를 기준으로 상대가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터져 나오는 불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불만이 다 그런 거다. 연인인데 나를 도와주지 않아서, 내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서 서운하다(웬수라는 말도 ‘도움이 안 되는 인간, 나에게 해를 끼친 인간’을 뜻하니 우리는 한탄을 하는 순간에도 기가 막히게 단어는 잘 고른다)! ……. 그런데 꼭 연인이 나를 ‘도와줘야’ 할까? 나를 도와주기 위해 살아야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나의 불만이 조력을 바라는 마음이었다면, 우리의 ‘좋았던 때’도 다르게 보인다. 그것 역시 단지 나의 욕구를 기준으로 이 사람이 ‘유익한 무언가’였기 때문에 잠깐 내가 기분이 좋았던 것인지도.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할 일은 감정의 불꽃을 다시 소생시키는 일이 아니다. 자아도취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나의 욕구에 기반하여 상대를 내게 ‘유익한 사람’으로 보는 일 이상이 못 된다. 나에 취해 보는 세상 속에서 상대는 늘 유익하거나 무익한, 안전한 혹은 위험한 무언가일 뿐이다. ‘내 세계’를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나의 안전과 욕구에 필요한 자를 붙들고 그렇게 되면 기뻐했다 안 되면 슬퍼했다, 이것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완전한 도구화다.

나에 취하면 보이는 불안한 세상

연인에게 불만을 표하는 게 이기적으로 보인다고 ‘이제 그러려니 한다~’는 말로 ‘깊지 않은 관계’를 괜찮다고 합리화하며 지낼 순 없다. 그건 자기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 우리는 나아질 수 있다. 방향이 틀린 것뿐이다. 그리고 그 나아지는 것은, 아무리 연인관계라도, 각자가 스스로를 위해 할 수밖에 없다. 사랑은 태도이고 성격이라 하였으니. 상대에게 잘해보자고(사실은 난 못하니 네가 해달라고) 조른다고 내 사랑이 잘 풀리는 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어떤 다른 길을 상상할 수 있을지 프롬을 통해 힌트를 얻어보자.

girl-3959203_640

우리의 사랑에 완전히 ‘내 세계’만 있진 않을 것이다. 사랑은 시작된다, 상대가 궁금한 마음이 올라옴과 동시에, 상대의 매력 포인트들이 눈에 보이며 그것을 계속 보고-갖고 싶어지면서. 프롬이 말하는 사랑은 궁금함을 지속시키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되고, 자기 자신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서 시장에 내놓아야 하는 문화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은 ‘갖고 싶다’ 쪽으로 훨씬 잘 기울어진다. 아, 저걸 가지고 싶다! 저걸 향유하고 싶다! 마음먹고 훈련하지 않으면, 그러는 사이 상대에 대한 궁금증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른 채 삶에서 사라진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도구화하는 것도 (그러면서 불평을 늘어놓는 것도!) 뻔뻔한 일일뿐더러, 여전히 ‘사랑의 불꽃을 되살리면 돼!’라는 믿음과 각고의 위에서 ‘내 세계’를 기준으로 이 사람이 좋았다~ 싫었다~ 사랑이네~ 웬수네~ 하는 건 지겨운 일이다. 뿐만 아니다. 우리가 ‘사랑의 기술’을 배워야 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사랑은 그저 하나의 대상에 대해 갖는 감정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세계를 받아들이는 개인의 태도이자 능력, 성격의 특성이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어떤 사람은 세계를 사랑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세계를 사랑할 수 없다. 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저 사람도 사랑할 수 있지만, 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저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니 자아도취형 인간의 문제는 그가 모든 세계를 이렇게 본다는 것이다―‘나에게’ 유익하거나 무익한 것, 혹은 위험하거나 안전한 것. 세계는 나에게 오직 유용과 무용으로만 나뉘게 되는 납작한 공간이 된다. 그는 세상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저게 나에게 좋을까?’, ‘저 사람이 내게 이로울까?’, ‘저건 내게 위험할까? 안전할까?’…….

girl-5640086_640
0 0 votes
Article Rating
guest
0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
0
Would love your thoughts, please comment.x
()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