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상 헌(감이당 금요대중지성)

고통보다 강한 동정

당사자는 견딜만한 현실일 뿐인데, 주변에서 난리인 경우들이 많다. 우리 사회에서는 대학 진학과 결혼 등이 대표적이다. 자기 능력과 진로를 고려해 대학을 가서 공부하면 되는 것이고,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때 결혼하면 되는 것이다. 삶의 한 과정이어야 할 일에 우리는 너무 호들갑을 떨고 있다. ‘대학을 (잘)못 간 아이’. ‘결혼을 못 한 아이’. “이 아이들을 어찌할꼬? 쯧쯧!” 당사자가 아닌 주변 사람들이 그 호들갑의 주인공들이다. 자기 일도 아닌 일에 왜 이리 난리일까?

동정이 실제 고통보다 더 강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친구 중의 한 사람이 어떤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르면 우리 자신이 직접 그 일을 저지른 것보다 훨씬 고통스럽게 느낀다.(니체, 인간적 Ⅰ』, 동정이 고통보다 훨씬 강하다, 책세상, 75)

‘고통보다 강한 동정!’ 니체는 동정이 고통보다 더 강하다고 말한다. 그 예로 우리는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른 당사자보다 주변에서 느끼는 고통이 훨씬 큰 세상’을 살아간다고 말한다. 잘 동의가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친구를 ‘자식’으로 바꾸어 읽어보자. 자식이 공부를 못하면, 공부 못하는 당사자는 별로 심각하지 않은데 엄마 아빠가 더 상처받는 경우들이 많다. 특히 대학 진학의 결과가 결정되는 이맘때면 자녀를 둔 가정은 아이의 한숨보다 부모의 한숨 소리가 더 크다. 이는 공부뿐만 아니라, 자식의 취업과 결혼에까지 이어진다. 이 한숨은 손자 손녀의 공부, 취업, 결혼까지 끝이 없다. 당사자는 잠시 아쉽거나 슬퍼하다 말일이고, 이 일로 자존심이 상하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지는 않는다. 심지어 왜 주변에서 ‘더 난리를 부리지?’라는 의문을 품기도 한다. 철이 없어 그렇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당사자는 자신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만큼만 고통스러우면 끝이다. 그리고 또 현실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 고통을 ‘동정’이라는 감정으로 상상하는 주변인들은 없는 고통도 만들어낸다. 그래서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곧 죽을 듯이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호들갑사진
하지만 이 고통을 ‘동정’이라는 감정으로 상상하는 주변인들은 없는 고통도 만들어낸다.

니체도 이런 우리의 마음을 놓치지 않았다. 니체는 우리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그 감정의 민낯을 드러내 보여준다. 니체는 동정에 대해서 늘 부정적이었다. 동정은 한편에서는 자신이 우월하다는 의식에 갇힌 행위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때 자주 동정의 감정이 일어난다. 자기의 가족이 한 치의 흠도 없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엄마 아빠들. 특히 자신이 공부도 잘하고, 취업도 잘하고, 지금까지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며 돈도 잘 벌어온 잘난 부모들일수록 이러한 감정은 더 크다. 자신이 승승장구한 만큼 자연히 자식들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럴 수가 없다. 인간의 욕심이란 아무리 잘해도 기대에는 미칠 수 없기에 기대가 큰 만큼 절망은 필연적이다. 이들은 또 자식의 삶을 자신이 다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니 늘 걱정에 빠져 살고, 일이 뜻대로 잘되지 않으니 수시로 좌절감에 사로잡힌다. 이제 호들갑은 서운함으로 변하고, 이것이 누적되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

나도 세상을 괴롭힐 정도의 힘은 있어!

‘동정’의 마음은 자신이 늘 옳다고 믿는 사람들. 혹은 가까운 누군가에게 뭔가를 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동정심을 발휘하는 것과는 반대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타인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경우들도 문제는 많다.

어린아이들을 관찰해보라. 그들은 울거나 소리침으로써 동정받고 자신들의 상태가 눈에 띌 순간을 기다린다 ; 병자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과 교제하며 살면서 스스로 물어보라, 능란하게 호소하고 흐느끼며 불행함을 과시하는 것이 결국 함께 있는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것은 아닌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 그들이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떤 힘, 즉 강자를 괴롭힐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하는 한, 함께 있는 사람이 표현하는 동정은 약자와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위안이 된다. 불행한 자는 동정 베풂이 자신에게 입증해주는 우월감으로 인해 일종의 쾌감을 얻는다 ; 자신은 아직도 세상에 고통을 줄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라는 그의 자만심도 커진다.(니체, 위의 책, 동정을 유발시키려고 하는 것, 78)

우는아이22

한편에서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하지 않아야 할 걱정’을 하는 사람들. 다른 한편에서는 존재감을 억지로라도 인정받고 싶어 ‘남을 괴롭히는 것’으로 자신의 힘을 확인하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삶의 약자들이다. 세상을 향해 ‘나는 약자로소이다!’를 고백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부모님 눈치를 보면서 울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 안 되면 할머니에게 눈을 돌리고, 이때 이웃에 사는 가까운 친척 어른이 와 주면 참 좋다. 이들은 내 편을 들어줄 것이 확실하기에. 어른이 된 지금, 이제 여든이 넘고 아흔이 다된 부모님들을 뵐 때면 “이분들은 겨울 난방비를 왜 이렇게 아끼시지?” “노인들은 왜 하나같이 전기장판에 이불을 두르고 계실까?” “옷도 실제 형편보다 남루하게 입고 있다.” 부모님 집에 다녀온 주변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이다. 한편으로 모두가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을 겪어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습관이라 이해도 해보지만, 여전히 왜 이런가 싶다!

니체의 눈에 이런 일은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솔직히 이런 정도라고 진단한다. ‘울거나 소리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것이 인간이고, 당신의 자식이 당신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는 정도의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저 인간이 힘을 발현하는 방식일 뿐이다. 참 어리석어 보이지만 우리 인간은 이렇게 살아간다.

sns
이렇게 우리는 쾌감을 자기 외부에서 억지로 만들어가면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세상에서 쓸 만한 힘이 조금이라도 있는 인간은 세상을 시끄럽고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경우들도 참 많다. 이들은 남을 성가시게 하고 상처 입히는 것을 즐거움의 원천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사교적인 대화에 능숙한 사람들이다. 사교적인 대화에서는 모든 질문과 대답의 4분의 3이 상대편을 조금이라도 괴롭히기 위한 것이다 : 그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대단히 사교를 갈망한다. 사교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을 느끼게 해준다. 악의가 힘을 떨치고 있는 이같이 많은, 그러나 극히 적은 양의 약에서도 사교는 삶의 가장 강력한 자극제이다.”(니체, 위의 책, 동정을 유발시키려고 하는 것, 78-79) ‘남의 괴로움을 내 삶의 자극제이다!’ 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교적인 대화 과정에서 상대가 주눅들거나 자신을 부러워하는 모습이 보이면 인간은 삶의 강력한 자극제를 얻는다. 오늘날 세상을 판치는 각종 SNS의 사진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나는 요렇게 꾸며서 요렇게 생겼어. 나는 요런 걸 먹고 있어. 나는 이런 데 와서 이렇게 놀고 있어! 이름만 다르지 모두 비슷한 모습, 비슷한 표정, 비슷한 공간, 비슷한 음식으로 드러내는 존재감이다. 이렇게 우리는 쾌감을 자기 외부에서 억지로 만들어가면서 살아가고 있다.

늪
이들은 이제 “악한 일을 한다는 쾌감 때문에 악한 일을 하는” 늪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생겨난 쾌감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쾌감은 점차 그 강도를 더해간다. 쾌감이 강도를 더해갈수록 인간은 남을 괴롭히고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주변을 성가시게 만드는 일에 빠져들게 된다. 이들은 이제 악한 일을 한다는 쾌감 때문에 악한 일을 하는(니체, 위의 책, 동정을 유발시키려고 하는 것, 79) 늪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이런 한탄을 자주 한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저런 일을 할 수 있지?” “짐승도 저런 일은 하지 않지!” 이들의 마음에 무엇이 있을까? 니체는 인간이 이런 일을 하게 되는 근원에 쾌락의 마음이 자리하고 있음을 관찰한다. 우리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들의 범죄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수록 더 쾌감을 느끼고, 거기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경우들을 많이 보아왔다.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코로나19’ 사태라는 전 세계적 위기 상황에서 ‘왜 꼭 저렇게까지 모여 기도를 해야 하는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의 목적은 우리가 아는 기도 자체가 아닐 것이다. 이들은 하지 말라는 일을 하는 것이 쾌감이 되었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이 되었다. 이들은 분명 힘의 발현이 잘못되었다.

진정 힘을 발현하고 싶다면

니체는 ‘심리학적 관찰’을 통해 우리가 가진 ‘도덕적 감각의 기원’을 하나씩 밝힌다. 니체의 관찰을 대할 때마다 조금은 당황스럽고, 부끄럽다. “나는 아니다!”라고, “나는 예외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니체는 단호하게 우리는 모두 이렇게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나는 이런 존재가 아니라고 부정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런 존재임을 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이 현실을 직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약자에서 강자로 전환할 수 있다. 니체는 인간은 ‘자신의 힘을 발현하면서 사는 삶’을 원했다. 니체 철학의 핵심인 ‘디오니소스적 힘’, ‘위버멘쉬’, ‘힘에의 의지’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발현하는 힘의 문제이다. 진정 힘을 발현하고 싶다면 약자의 힘자랑에 그치는 동정의 마음을 스스로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니체는 동정은 병일 뿐이다.”(니체, 『위의 책』, 「우울증」, 76)라고 말한다. 동정의 마음은 스스로의 힘을 고갈시키고, 모두에게 건강하고 명랑한 삶을 훈련할 기회를 박탈(당)할 뿐이다. 동정은 개인의 차원이든, 공동체의 차원이든 건강에 해롭다. 동정은 병일 뿐이기에 그것은 건강한 삶을 위해 반드시 치료되어야 한다.

강자

그러니 이제 우리는 타인을 향해 자신의 힘을 발휘하는 ‘호소’나 ‘사교’ 대신 자신을 향해 힘을 축적하고 발현하는 ‘고독’과 ‘침묵’에 빠져보자. 혼자 빠지는 고독과 침묵은 위험하지만, 니체라는 사상가를 따라 빠지는 고독과 침묵은 자기 성숙으로 가는 길이 될 것이다. 자기 성숙을 위한 첫걸음은 타인을 향한 시선을 자기에게로 옮겨오는 것이다. 이 길은 그동안 약자들의 힘자랑을 위해 애썼던 것들을 하나씩 버리는 과정이다. 동시에 강자가 ‘힘’을 발현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강자들은 자신의 힘을 우월감에 빠져 자랑하거나 남에게 억지로 호소하지 않는다. 강자들은 자신과 세상을 위해 힘을 축적하고 온전히 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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