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숙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水澤 節   ䷻

節, 亨, 苦節, 不可貞.

절괘는 형통하니, 억지로 제어하는 것은 올바름을 굳게 지킬 수 없다.

初六, 不出戶庭, 无咎.

초육효, 문 바깥 정원에 나가지 않으면 허물이 없으리라.

九二, 不出門庭, 凶.

구이효, 집안에 있는 정원에 나가지 않으니 흉하다.

六三, 不節若, 則嗟若, 无咎

육삼효, 자신을 절도에 맞게 제어하지 않으면 탄식하게 될 것이니 탓할 곳이 없다.

六四, 安節, 亨.

육사효, 절제함에 편안하니 형통하다.

九五, 甘節, 吉, 往有尙.

구오효, 아름다운 절제라서 길하니 그대로 나아가면 가상함이 있다.

上六, 苦節, 貞凶, 悔亡.

상육효, 억지로 절제하는 것이니 고집하면 흉하고, 고치면 후회가 없어진다.

초고 마감이 사흘 앞이다. 초고지만 마감은 마감이다. 이렇게 마감이 닥치면 하루의 매 시간이 글쓰기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마음도 급해지고 쫓기듯 글을 쓰게 된다. 생각대로 글이 잘 풀리면 다행이련만 불행히도 급할수록 글은 더 진전이 안 된다. 날짜는 다가오고 참 몸도 마음도 힘들기 그지없는 형국이 된다. 막판에 급할 땐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잠을 줄이기도 다반사다. 이럴 땐 고행이 따로 없다. 좋자고 하는 일인데 자신을 괴롭고 힘들게 하고 있는 모양새다.

수택절 괘를 보고 자연스레 떠오른 것이 글쓰기였다. 감이당의 모토의 하나가 ‘글쓰기로 수련하기’다. 매 학기 공부한 것을 글쓰기로 마무리하며 한 마디를 넘어간다. 학기 중에도 수시로 글쓰기의 미션은 주어진다. 수택절괘의 절(節)은 마디, 절제, 절도라는 의미다. 글쓰기는 절의 과정 그 자체다. 일상의 산만함을 절제하지 않고 글을 쓰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분산된 일상의 동선을 가지치고 절제해 글쓰기에 시간과 마음을 모아야 한다. 그뿐인가. 글을 써 본 사람은 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과는 달리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는지… 제멋대로 흩어지는 생각과 말들을 수습하고 자르고 절제하지 않고는 글을 쓸 수가 없다. 하지만 글쓰기를 마치고나면 힘들고 괴로운 만큼 기쁨과 성취감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게 절제의 묘미다. 이렇게 글쓰기는 습관적으로 반복하던 말과 행동과 생각을 절도(節度)하고 절제함으로써 지금까지 달려오던 삶의 방향과 속도에 브레이크를 건다. 새로운 변화의 마디를 내는 것이다. 글쓰기가 존재와 삶의 변형을 이루어내는 수련이 되는 이유다.

브레이크
이렇게 글쓰기는 습관적으로 반복하던 말과 행동과 생각을 절도(節度)하고 절제함으로써 지금까지 달려오던 삶의 방향과 속도에 브레이크를 건다.

글쓰기는 마감과 함께 한 마디를 긋는다. 글쓰기를 이끌어가는 힘이 마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젠가 곰샘(고미숙 선생님을 연구실에서는 이렇게 부른다)이 “마감이 우리의 구원이자 종교”라고 했다. 맞다. 마감이 없으면 그 많은 글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까. 감이당에서의 글쓰기는 말할 것도 없지만,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써내는 글들도 마찬가지다.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건 글쓰기는 마감과 함께 완성된다. 아무런 절제의 과정 없이 그때그때 배설하듯 뱉어내는 글이 아닌 한.

그런데 마감은 해야 하는데 글이 잘 진척이 안되거나 시간에 쫓길 때는 글쓰기가 괴로운 미션이 된다. 억지로라도 마감을 해야 하는 괴로운 절제(苦節)인 것. 이런 고절로는 아무리 글쓰기에 둔 뜻이 좋아도 그 올바름을 굳게 지킬 수 없다(苦節不可貞). 이렇게는 오래도록 글쓰기를 지속할 수가 없는 것이다(不能常). 절괘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 괴로운 절제, 억지로 하는 절제다. 고절은 절제의 도를 궁색하게 한다(其道窮也). 그래서 상육효에서는 ‘억지로 절제하는 것을 고집하면 흉하니 후회하지 않으려면 고치라’(苦節, 貞凶, 悔亡)고 했다. 힘든 절제 끝에라도 어떻게든 마감하고 한 고비를 넘어가면 되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다. 그런 고절을 고집하면 흉하기까지 하니 고치라 한다. 당연히 절괘의 도를 따라가 보지 않을 수 없다.

괴로운사진
절괘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 괴로운 절제, 억지로 하는 절제다.

수택절괘는 기쁨을 상징하는 태괘가 안(아래)에 있고 험난함을 상징하는 감괘가 밖(위)에 있다. 기뻐하면서 험난함을 겪는 것이 절이다(說以行險). 글쓰기라는 절제의 과정이 힘들어도 기쁨이 없으면 하지 못하듯이. 험난하더라도 절제하고 조절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라는 말이다. 괘상으로 보면 태괘는 연못이고 감괘는 물이다. 연못에 물이 과도하면 넘친다. 위로부터 절제의 도를 받아들여 넘치기 전에 아래로 흘러가게 하면 사효처럼 편안한 절제가 된다(安節). 알맞은 양과 정도의 조절이 곧 올바른 절제이고 기쁨이고 편안함일 것이다. 이러한 절제가 체득되어 저절로 행해지는 경지가 오효의 아름다운 절제다(甘節). 하늘과 땅도 절도가 있기에 24절기와 사계절을 이룬다(天地節而四時成). 사람도 그에 맞추어 법도를 제정해 절제하는 것(節以制度)을 배우고 세상살이에 적용한다. 그래야 ‘재물을 손상하지 않고 백성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不傷財 不害民)고 했다. 글쓰기의 마감에 쫓겨 잠도 편히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절제로서 이루어지는 천지자연의 법칙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몸을 손상하고 해롭게 하는 짓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무리 글쓰기에 둔 뜻이 올바르더라도 그런 괴로운 절제로는 오래갈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 흉하다고 한 것이다.

물
위로부터 절제의 도를 받아들여 넘치기 전에 아래로 흘러가게 하면 사효처럼 편안한 절제가 된다(安節).

그러나 흉함에서 벗어날 길 또한 알려주는 게 주역이다. ‘고치면 후회가 없다(悔亡)!’ 후회하지 않으려면 괴로운 절제를 해온 지금까지의 습벽을 고치라는 것. 어떻게? 그 길은 “과도함을 덜어내고 중도를 따르는 것”(정이천, 『주역』, 1176쪽)이다. 중도란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음이다. 말이 쉽지 이런 중도의 경지를 얻기가 어디 쉬운가. 대상전에서 그 구체적인 방법을 찾았다. “연못 위에 물이 있는 것이 절괘의 모습이니, 군자는 이 모습을 본받아 수와 도를 제정하며 덕과 행위를 의논한다.(澤上有水, 節, 君子以制數度議德行)” 수(數)는 많고 적음이고 도(度)는 길고 짧은 것, 혹은 법으로 제정한 것을 말한다. 마치 제정된 법령과 규범을 지키듯이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알맞은 양과 길이의 정도를 정해 지키라! 이렇게 스스로 자신에게 ‘적중한 절도’의 균형점을 헤아려 실천하라! 이것이 바로 중도의 덕과 행위를 이루는 길이다(議德行).

그동안 마감에 쫓기는 이유가 단지 미리미리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왜 좀 더 일찍 서두르지 않았을까’ 후회하며 다음부터는 반드시 일찌감치 시작하리라 다짐한다. 그러다 다시 마감이 닥치면 비슷한 반복이다. 그런데 절제에서 중도란 미리 시간을 앞당기고 말고가 아니다. 봄이 여름을, 여름이 가을을 미리 준비한다고 당길 수 없는 것처럼. 혹 억지로 당겨진다 해도 리듬에 어긋난 계절은 이상기후일 뿐 제대로 된 계절이 아니지 않은가. 봄·여름·가을·겨울의 큰 마디들은 그 사이사이 24절기라는 작은 마디들을 통과해야 맞이할 수 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최종 마감이라는 큰 마디는 그 이전 마디마디들의 차서를 밟은 후에 이루어진다. 책을 읽고 자료를 모으고 메모하고 구상하며 글을 시작하는 모든 과정들이 그 차서의 마디들이다. 그 마디마디의 내용들, 양과 정도와 순서를 자기에 맞게 구성하고(制數度), 그것을 그때그때 실천할 때 제대로 된 절제의 마디를 만들고 중도의 덕을 이루는 훈련이 된다(議德行). 헌데 이런 사실을 알아도 혼자서 실천하고 훈련하기란 쉽지 않다는 게 고질적인 문제다.

계절

어느 날 마감을 목전에 두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우리들을 보다 못한 곰샘이 언명했다. 원래 마감 날짜에서 한 주 앞당겨 글을 완성하고. 마감이 닥쳐서 잠을 줄이거나 쫓기듯 글을 쓰는 자는 글을 쓸 자격이 없으니 글쓰기에서 하차하라고. 밤을 새서라도 마감을 일찍 끝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미리미리 글쓰기의 차서를 제대로 밟고 있는가를 훈련하라는 것이다. 이후 우리는 매주 서로 진척되는 상황을 체크하고 공유했다. 이렇게 법령과 규범처럼 함께하는 약속을 해놓으니 어떻게든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게 된다. 덕분에 초고의 마감을 앞두고 시작한 이 글이 한결 여유롭게 최종 마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 글쓰기의 마감을 너무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걸 알았다. 절괘의 도는 절제 없이, 마디 없이 이루어지는 변화와 생성은 없음을 말한다. 글쓰기는 절제로써 변화 생성하는 삶을 살게 하는 탁월한 삶의 도구이자 기술이다. 매번의 마감은 매번의 변화이고 완성이자 새로운 마디의 시작점이다. 그러니 스스로, 적극적으로 마감들을 만들어 낼 일이다. 그렇게 능동적으로 마감과 마디들을 생성할 때 괴로운 절제는 기쁜 절제가 되고, 여유로운 마감의 기쁨 또한 누릴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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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민
소민
4 months ago

정말 모든 일에 “마감”이 있어야 몸이 움직이는 것 같아요. 일도 글쓰기도요! 제가 일하는 대학원에서도 학생들은 매주 정해진 랩회의에 맞춰 결과물을 가지고오더라고요^^ 랩회의 바로 그 전날에요ㅋ 저희가 에세이 하는 거랑 똑같이요ㅎㅎ

매번 글쓰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질때면 미리 준비하지 못한 제 자신을 탓하거나 아니면 시간이 없었다는 외부 상황에 원인을 돌리곤 했었는데… 글쓰기의 차서를 지키며 한발한발 즐거운 절제를 연습해보아야겠습니다~*

Last edited 4 months ago by 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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