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상 헌(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정의라는 금언

나에게 오래된 ‘금언’이 하나 있었다. 늘 마음속에 품고 있었고,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것만은 놓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삶을 지키는 나름의 윤리였다. 그 금언은 이렇다. “내부 그룹에서는 ‘정직’을! 사회적 차원에서는 ‘정의’를!”

‘정직’과 ‘정의’, 이 둘은 20대 후반 이후 나의 삶을 이끄는 원칙이었다. 이는 대학원 진학 후 만난 선생님을 중심으로 형성된 우리 그룹의 공통 비전이기도 했다. 함께 공부하고 삶을 살아가는 동료, 가족, 그리고 나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 그룹에서는 ‘정직’을! 이 금언은 지금껏 니체를 읽어도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니체 읽기가 거듭될수록 그동안 내가 금언으로 가지고 있었던 ‘정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정의’를 금언으로 삼게 된 이유는 ‘나의 공부와 삶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공정하고 공평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이것은 나만의 금언이라기보다는 당시 내가 속해 있었던 그룹의 공통 금언이기도 했다. 구성원들은 초중등 학교 교사와 나처럼 대학에서 공부하고 강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멤버들은 ‘공교육’의 정신을 누구보다 강조했고, 그 정신이 각자의 현장에서 잘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일부는 ‘입학사정관’이 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도 ‘사회적 교환가치의 증대’와 ‘서열화된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도구로 기능하는 대학 입시 제도를 ‘공적인 가치’로 그 방향을 바꾸어보려 노력했다. 각자의 현장에서 ‘공공의 가치’, ‘공평한 기회’, ‘모두에게 무대를 제공하는 교육’ 등이 실현되길 간절히 원했고, 이를 위해 필요한 공부와 실천을 위해 애썼다. 우리는 이렇게 배우며 실천하는 삶이 옳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

졸업사진

정의의 겉모습에 반했던 나

인간이 지적 습관에 따라 소위 올바르고 정당한 행위의 본래 목적을 망각하게 되었으므로, 즉 수천 년에 걸쳐 어린아이들은 이와 같은 행위를 찬미하고 모방하도록 교육받아왔기 때문에, 공정한 행위가 점차 비이기적인 행위인 듯 보이는 겉모습이 형성된다 : 그러나 공정한 행위를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겉모습 때문이다. 게다가 이것은 존중받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지속적으로 커져간다 : (니체, 인간적 Ⅰ』, 정의의 유래, 책세상, 102)

 

나에게 ‘정의’란 무엇이었을까? 당시 나는 ‘사회 계층, 지역, 남녀, 종교’ 등에 제약받지 않는 교육기회, 나아가 과정과 결과까지도 공평하고 공정한 교육을 실현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제도를 연구하고, 정책을 제안하기도 했으며, 때론 직접 현장에서 이런저런 직책을 맡기도 했다. 또 그 과정에서 그것이 크든 작든 내가 남을 짓밟고 어떤 것을 취하거나 누리지는 않겠다는 것을 마음속에 늘 품고 살았다. 이런 나의 태도를 스스로 좋아했고, 나름 자부심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을 존중했고 나도 그런 사람으로 존중받고 싶었다.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공적인 사람, 혹은 비이기적인 사람이라 평가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여겼다. 이런 나의 태도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가 가진 공적인 가치를 실천할 역량이 부족한 것이 문제이지, 그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이 공적인 가치를 더 잘 알고 이를 세상에서 실천할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함께 모여 공부하고 일하는 이유 또한 하루라도 빨리 그 방법을 찾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공부를 했고, 세상에 나가 일을 했다. 점차 우리가 만들어가는 이상은 커져갔고, 이상이 커져갈수록 우리는 더욱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수시로 ‘00위원회’의 위원이 되기도 했고, 어떤 조직의 장이 되기도 했으며, 이에 덧붙여 각종 정책 연구 과제를 수행하느라 다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

조금씩 일은 힘들어졌고, 내부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내가 속한 조직과의 갈등도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역겨움이 몰려왔고, 나는 이 현장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나는 한동안 이유도 모른 상태에서 늘 마음에 품고 있었던 이런저런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만난 니체! 그는 나의 이 원인 모를 역겨움을 풀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역겨움

니체는 ‘공평’이라는 말에 빠져있는 나 같은 사람들을 향해 정의의 ‘겉모습’에 반한 사람들이라 했다. 실제로 나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일을 하면 할수록, 우리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거나 자기만 아는 사람들로 보였다. 우리는 세상을 위해 이렇게 사심없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우리의 이상에 동의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은 너무너무 중요하며,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은 속물로 여겼다. 이들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정의의 속살을 보다

한동안 나를 힘겹게 했던 ‘역겨움!’ 하지만 그것이 영원하지는 않았다. 역겨움은 나에게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앎과 삶을 만날 계기가 되었다. 물론 ‘니체’를 비롯한 새로운 공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비위가 약한 사람이 느끼는 것이 역겨움이기도 하지만, 강한 위장과 소화력을 강조하는 니체가 말하는 역겨움은 그것과는 다르다. 니체는 생명의 저 깊은 본성에서 뭔가 새로운 것이 생성될 때, 느끼는 역겨움을 말한다.

봄
니체는 생명의 저 깊은 본성에서 뭔가 새로운 것이 생성될 때, 느끼는 역겨움을 말한다.

나의 경우를 보면 과거 내가 헌신했던 공적 가치는 정의의 ‘속살’이 아니었다. 이 정도 개념으로는 ‘정의’라는 것이 인간의 삶으로 들어가 나와 공동체의 삶을 위대하고 건강하고 강하게 만들어갈 수는 없다. 그것은 정의의 겉모습 혹은 정의에 대한 나의 착각이었다.

정의의 최초의 성격은 거래의 성격이다. () 정의는 거의 대등한 힘의 상태를 전제한 보상이며 교환이다 :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복수도 정의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하나의 거래이다. 감사도 마찬가지이다.정의는 물론 통찰력 있는 자기보존의 견지에서, 무엇 때문에 나는 아무 이익도 없이 해를 당하기만 하고 더욱이 내 자신의 목표도 달성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라는 이기주의에서 출발한다.(니체, 위의 책, 정의의 유래, 101-102)

 

나의 착각은 니체로 인해 깨지기 시작했다. 니체에 의해 벌어진 그 틈새로 나는 점차 정의의 ‘속살’을 보게 되었다. 니체는 정의의 유래를 고대 사회의 전쟁과 경쟁(아곤)의 사례를 통해 ‘거래의 성격’이었음을 밝힌다. 그 거래란 ‘거의 대등한 힘의 상태를 전제한 보상이며 교환’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례로 ‘복수’와 ‘감사’를 든다.

전쟁에 패한 국가는 복수를 위한 힘을 키우고, 또 이긴 국가는 상대의 복수를 늘 염두에 두고 힘을 키운다. 니체가 주목한 고대 사회에서는 공동체를 지키고 강화하기 위한 전쟁을 하지만 상대를 기본적으로 존중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현대의 지극히 심리적인 자기 위안 혹은 정신승리법과는 달리 고대 그리스의 ‘복수’는 서로를 존중하는 기제였다. 복수를 위해 자신을 철저히 연마했다. 이런 의미에서 복수는 고대 사회에서 일종의 수신(修身)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올림픽과 같은 경쟁에서 볼 수 있지만 이긴 자와 패한 자 모두, 경기 후 서로에게 감사의 표시를 표한다.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지만, 이는 즉시 비난과 웃음의 대상이 된다. 비슷한 힘으로 싸웠다는 것은 그 경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자신의 힘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기에 서로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 맞다. 그러니 전쟁이든 경쟁이든 그것은 곧 남을 해치고 제압하고 박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상대와 동등하게 만들고 유지하는 과정이었다. 고대의 전쟁과 경쟁(아곤)은 상대를 해치는 것이 목적이 아닌 각자의 힘을 키우는 과정이었다.

체스

‘힘의 대등함’으로서의 정의! 그것은 나의 힘을 키우는 것에서 시작된다. 하여 정의는 이제 밖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나를 향할 때 진정 정의일 수 있다. 비이기적인 것이 정의라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정의의 겉모습일 뿐이다. 정의의 본래 목적은 자기보존을 위한 거래였다. 그것은 생명을 보존한다는 측면에서 이기적인 행동이다. 생명을 보존할 수 없다면 그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정의이다.

과거에도 공부로 나와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어느 순간 그 공부는 내 삶의 에너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중년이 된 지금 새롭게 만난 니체는 나를 다시 활기차게 한다. 니체는 ‘공적 가치’라는 틀에 갇혀있던 나를 다른 존재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는 나와 세상의 관계를 깊고 넓게 확장시켰다. 니체를 통해 ‘모든 존재가 위대한 긍정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묻게 되었다. 이를 위해 어떤 공부를 하고 실천할 수 있을지를 탐구하게 되었다. 나의 공부와 삶에 새로운 과업이 생긴 것이다. ‘서로를 해치지 않으면서, 각자의 힘과 공동체의 힘을 키울 수 있는 경쟁!’ 이를 통해 탄생하는 건강하고 위대하고 강한 ‘생명공동체!’ 니체가 발견한 정의였다. 이제 나의 새로운 과업이 되었다. 이 과업을 완수하는 것이 오늘 나의 ‘정의’이다.

0 0 vote
Article Rating
guest
0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
0
Would love your thoughts, please comment.x
()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