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숙(감이당)

본능대로 사는 동물

감각을 지각하고(受), 모습을 그리며(想), 의지를 가지고(行), 인식(識)하며 행동하는 정신적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직접 보지도 듣지 못한 것, 즉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을 관념적으로 생각해내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는 사유능력과 언어능력을 발달시켰다. 인간은 이 능력으로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내일’이라는 것을 탄생시켰다.

동물은 지금 이 순간만을 산다. 그들에겐 이다음 순간을 의식적으로 사유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 다음 순간을 생각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관념적으로 생각해 낸 ‘내일’과는 다르다. 곰이 겨울을 대비하여 자신의 몸집을 불리고, 연어가 알을 낳으려 거센 물살을 헤치고, 거미가 밤마다 아름다운 거미집을 짓고, 다람쥐가 한입 가득 도토리를 물고 땅을 파는 것은, ‘내일’이라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고 준비하는 행동이 아니다. 아주 오랜 세월 진화의 과정을 거치며 자신들의 몸에 새겨진 본능이다. 이 본능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진 것. 유식으로 보면, 동물의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業) 종자’의 발현이다. 업종자는 훈습된 행위가 아뢰야식에 저장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거미의 아뢰야식엔 거미집을 짓은 행위의 업이 저장되어 있을 것이고, 연어의 아뢰야식엔 때가 되면 강을 거슬러 오르는 행위의 업이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이처럼 동물은 ‘내일’이란 것을 알고 다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아뢰야식에 저장된 행위의 업(업종자)이 때가 되면 행위를 반복하게 할 뿐이다. 자기 몸에 새겨진 본능대로 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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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사유하는 인간

그러나 인간은 ‘내일’을 사유할 수 있다. 인간이 ‘내일’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유식으로 보면 아뢰야식의 종자들 중 ‘명언종자(名言種子)’가 활성화되었다는 것이다. 명언종자는 관념(생각)과 언어와 관련한 종자이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동물과 같은 본능적 행위의 반복만이 아니라, ‘내일’과 같은 관념적인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 인류의 마음이 어떻게 진화되었는가를 다루는 『마음의 역사』에서는 뇌의 용량은 호모 에렉투스의 750~1,250cc에서 네안데르탈인의 1,200~1,750cc로 증가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뇌 용량의 “확대는 사회적 지능과 언어능력의 발달”, 즉 “광범위한 어휘와 복잡한 문법을 가진 언어 형태로 변화된 사실을 반영”한다고 한다.

인간이 관념과 언어를 발달시킨 데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른 동물보다 기능적인 면에서 떨어지는 인간은 힘을 합쳐야 살아날 확률이 높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이 본능적 깨달음이 무리를 짓도록 했고, 무리 내에서 다른 사람들과 원만하게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은 자손을 둘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다. 이는 사회성 발달을 촉진하고, “사회성이 발달한 영장류일수록 두뇌 피질이 더욱 잘 발달”(『붓다 브레인』 p186)되므로, 살아남기 위한 본능은 결국 인류에게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언어를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로써 인간의 삶은 동물과 완전히 달라졌다. 동물은 아뢰야식의 업종자가 현실을 현행시키면, 현행된 현실을 단순히 인식(동물에게도 ‘식(識)’이 존재하므로)하여 다시 아뢰야식에 저장한다. 자신이 현행시킨 현실이지만 그 현실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할 능력이 없다. 그러니 인식한 것을 단순히 저장하고, 저장한 것을 다시 현행하며 종자를 무한 반복한다. 종자의 무한 반복은 같은 행위의 반복이다. 본능의 반복, 본능의 윤회. 동물들의 탁월한 운동 신경, 신묘한 자기 보존 능력은 이러한 무한 반복된 삶을 살아가면서 습득한 업종자 덕분이다. 그런데 인간은 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하는 행위를 자각(自覺)하며 그것을 해석하여 말로 표현하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이 능력이 지금껏 그 누구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내일’이란 관념을 만들었다. ‘내일’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그러니 누구도 경험할 수 없다. 오지 않는 미래인 ‘내일’에 대한 관념은 자연스레 지나간 과거인 ‘어제’도 만든다. 이로써 인간은 천지에 ‘시간’이라는 가상(假)의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동서남북’이라는 가상의 공간도 만들고, 이후 수많은 가(假)의 것들(관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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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천지에 ‘시간’이라는 가상(假)의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동서남북’이라는 가상의 공간도 만들고, 이후 수많은 가(假)의 것들(관념)을 만들었다.

인간, 원하는 현실을 만들다

뇌 용량의 증가와 함께 아뢰야식의 ‘명언종자’가 활성화되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의 현실을 현행시킬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도 할 수 있다. 천지(天地)에 가상(假)의 줄을 그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인간의 명언(관념, 언어) 능력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것들을 현실로 드러내는 능력이다. 인간이 관념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뢰야식에 명언종자 형태로 저장되고, 그 명언종자들은 현실로 현행된다. 동물은 그들이 직접 경험한 것만(업종자)을 현실로 현행시키지만,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뿐만 아니라 ‘생각한 것’도 현실로 현행시킬 수 있다. 무엇을 생각하든 그것을 현실에 현행시킬 수 있는 인간. 그러니 상상한 것은 무엇이라도 현실로 만들어 낸 지금의 화려한 문명은 인간 아뢰야식의 명언종자가 활성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본능을 무한 반복하는 동물과 같은 삶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고 말한 대로의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내일’이라는 가상(假)을 만든 인간은 그 능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현실로 현현시켰다.

한편, 뇌 용량의 증가를 명언종자의 활성화와 연관시킬 때, 뇌 용량의 증가가 명언종자를 활성화시켰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유식으로 보면, 타인과 공동체를 형성하여 소통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이 명언종자를 활성화 시키고, 명언종자의 활성화에 맞춰 뇌 용량이 증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과 소통하려면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受)한 비슷한 모습의 것(想)들을 같은 이름을 붙여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行) 인식(識)하는 정신적 과정이 중요해진다. 예를 들어, ‘노루’를 봤을 때, 감각기관(보통 눈을 사용한다)으로 무언가를 지각(受)하여, 노루모양의 형상(想)을 띤 것을, ‘노루’라는 이름을 붙여 보편성을 형성(行)하고, 다시 그것을 ‘노루’하고 인식할 줄 알아야(識) 타인과 소통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타인과 소통하여 공감하고자 하는 인류의 마음이 ‘관념과 언어’라는 ‘명언종자’를 활성화시켰고, 이 명언종자의 활성화가 뇌 용량의 증가라는 현실을 현행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인류는 아뢰야식의 명언종자가 활성화되면서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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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괴롭다

전복을 손질하다가 전복이 괴로우냐? 내가 괴로우냐?는 질문에서 여기까지 왔다. 괴로움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사실 누가 더 괴로운지 모른다. 나는 내가 겪는 괴로움만 알 수 있을 뿐. 전복은? 짐작할 뿐이다. 그래 짐작.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인류가 만들어 낸 ‘내일’처럼 나는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전복의 고통을 짐작한다.

짐작은 공감의 능력에서 생긴 것이다. 타인을 나에 비추어 생각하는 공감은 무리 내에서 다른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성을 발달시켰다. 그리고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受)한 비슷한 모습의 것(想)들을 ‘같은 이름을 붙여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行) 인식(識)하는 정신적 능력을 활성화 시켰다. 이 정신적 능력이 지금의 문명을 이루어냈다. 인간은 더 이상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지도 않아도 되고, (비를 그대로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버튼 하나를 누르는 것만으로 따뜻하고 밝은 자신의 공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포식자로부터 안전하게 자신을 지켜내는 수많은 도구들을 만들어 냈으며, (포식자를 아애 없애 버렸다) 자신이 원하는 상대와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생식 활동을 할 수 있다. (포유류 중 발정기가 아님에도 쾌감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 성행위를 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의 이러한 정신 능력은 필연적으로 괴로움(苦)도 함께 만들어 냈다. 동물은 눈앞에 마주친 것에 대해서만 공포를 느낀다. 그것이 지나가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인간은 경험하지 않은 수많은 것에도 괴로움을 느낀다. ‘내일’이라는 가상(假)에 이름 붙여 시간을 보편화한 그 능력이, 만나면 떠나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愛別離苦), 떠나면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게 하고(怨憎會苦), 얻으면 잃을까를 생각하게 하고(求不得苦), 태어나면 죽을까 병들까 늙을까를 생각하게 한다(生老病死). 이 모든 것들은 필히 괴로움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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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러한 정신 능력은 필연적으로 괴로움(苦)도 함께 만들어 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삶을 살게 한 정신의 능력, 그중에서도 ‘같은 이름을 붙여 보편적인 것으로 의미화’ 하는 능력 즉 ‘관념과 언어(명언)’의 능력은 문명과 함께 괴로움도 만들어 냈다. 생각하고 말하며 자신의 현실을 창조해내는 인간은, 더 이상 본능대로만 살지 않아도 되는 문명화된 세상을 만듦과 동시에, 생각함과 동시에 모든 것이 괴로움(苦)이 되는 세상도 만들었다. 2,500년 전, 붓다는 인간이 처할 이 상황을 꿰뚫어 본 것일까? 문명이 발달할수록 괴로움도 증폭되는 인간 정신의 아이러니. 그는 인간이 문명화되는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길(道)을 찾아 나섰다. 붓다가 찾은 길은 뭘까?

 

아! 전복 얘기를 마무리해야겠다. 다시는 전복을 먹지 않겠다는 류의 마무리가 아니다. 전복을 다듬는 행위를 통해 생각한 인간 괴로움의 근원에 대한 것이다. 공감은 탁월한 인간의 능력이다. 이 능력 덕에 인간은 타인을 알게 되고, 미지의 세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앎은 ‘있는 그대로’의 타인,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것은 아니다. 사실 있는 그대로의 타인과 세계를 알 방법은 없다. 아니, 있는 그대로의 타인과 세계는 없다) 그러니 인간의 인식 확장은 공감 능력 덕이다. 나는 전복의 고통에 공감했다. 덕분에 내 인식은 전복의 고통에까지 확장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괴로움의 원인은 아니었다. 나의 괴로움은 공감 후에 발생했다. 공감 후 그것을 언어화한 수많은 관념들에서 발생했다. ‘살아있는 생명을 죽인다’, ‘내가 죽였다’ 등의 관념들. 나의 괴로움은 내 행위에 대한 스스로의 해석에서 생긴 것이다. 인간의 괴로움, 그 근원은 바로 이 관념화(명언)에 있었음을 전복을 다듬으며 깨달았다…가 내 전복 얘기의 마무리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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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민
소민
5 months ago

명언종자가 활성화 된 인간이 “내일”이라는 관념을 만들고, 
또 실제로 경험하지 않아도 생각만으로 현실화한다는게 신기하고 재밌었어요~

하지만 이 때문에 괴로움도 겪는다는 것!
인간이 생각하는 걸 현행할 수 있다면, 괴롭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아요. 이걸 수행이라고 하는 걸까요?ㅎㅎ 다음 글이 기다려집니다^^

Last edited 5 months ago by 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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