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영(남산강학원)

스스로 해치는(자포) 자와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스스로를 버리는(자기) 자와는 함께 일할 수 없다. 말마다 예와 의를 비난하는 것을 자포(自暴)라 하고, 내 몸은 인에 살 수 없고 의를 따를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자기(自棄)라 한다.

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요, 의는 사람의 올바른 길이다. 편안한 집을 비워놓고 살지 않으려 하고 올바른 길을 버려두고 가지 않으려 하니, 안타깝구나!

「이루」 (상), 『맹자, 마음의 정치학 2』, 배병삼 옮기고 풀어 씀, 사계절, 147쪽

‘자포자기’에 대한 오해

나는 뭔가를 호기롭게 시작했다가 흐지부지 작심삼일로 끝날 때가 많았다. 시작할 때 가졌던 결심의 강도가 종종 옅어지기도 한다. 심지어 지레 겁먹고 시작조차 못해본 경우도 있었다. 우리는 이런 걸 ‘자포자기(自暴自棄)’라고 말한다.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처음 이 문장을 대했을 때 깜짝 놀랐다. 지금도 종종 사용하는 ‘자포자기’란 말을 맹자가 살던 때부터 썼구나, 이렇게나 오래된 말이었다니. 게다가 ‘자포자기’의 어원을 살펴보니 단순히 체념, 무기력, 의지박약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자포자기는 ‘인의(仁義)’의 문제였다! ‘난 안돼. 난 할 수 없어’라고 포기하는 것이 불인(不仁)이고 불의(不義)라면 한번 생각해볼 문제 아닌가?

거꾸로 뒤집어 봐도 자포자기의 의미가 새롭게 드러난다. 얌체 운전족이 있다. A는 급하지만 길게 늘어서 있는 차 뒤에 대고 한 대씩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약속시간은 다가오고, 마음은 급하지만 끼어들기를 할 수는 없었다. 헌데 차량 한 대가 앞에서 보란 듯이 새치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그(B)를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욕한다. 통행의 질서를 어지럽힌 나쁜 사람이라고. 맹자의 말에 따르면 B는 자포자기한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스스로를 이롭게(利己)’ 하기는커녕 오히려 ‘해치고 버린’ 사람!

B와 같은 사람은 목적지에 빨리 도달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나만 빨리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인(仁)할 기회를 놓치고 의(義)로운 사람 되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조금 늦더라도 순서를 지키고 질서를 어지러뜨리지 않는 것이 인(仁)이다. 인할 기회를 스스로 저버렸다는 점에서 B는 자포자기한 사람이다.

과속 택시

입춘이 지나면서 연구실 프로그램이 속속 개강하고 있다. 나는 올해(2021년) ‘글쓰기 고전평론반’에 등록하였다. 지난 12월 방학이 시작되면서 일찌감치 등록은 마쳤지만 방학 내내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마음과 싸워야 했다.

‘글쓰기 고전평론(이하 글고평)’에서는 1년 동안 6권의 고전을 읽는다. 매 학기 발제와 강독으로 읽고 쓰는 존재로서의 삶을 실험하고 체험한다. 마지막 4학기 때는 그중 1권을 정해 리라이팅해야 한다. 공부의 문턱 앞에서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나. 고전과 찐하게 씨름하며 본격적으로 읽기와 쓰기를 연마해보고도 싶다.

하지만 텍스트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텍스트와 만나야 하는데 안 만나지면 어떡하지? 발제와 강독으로 자기주도적인 학습을 해야 하는데 해낼 수 있을까, 발표할 때 엄청 긴장될 텐데, 글쓰기의 중압감을 이겨낼 수 있을까? 대중지성 각 프로그램에서 몇 년씩 공부하신 분들 사이에서 완전 주눅 들면 어떡하지, 버텨낼 수 있을까? 또 개인적인 일정들이 있다. 올핸 몇 년 미뤄뒀던 집공사를 하려고 하는데 그 번다한 일과 공부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걱정과 두려움이 꼬리를 물었다. 자신 없을 바에는 아예 시작하지 말까? 포기…할까?

포기할 수 없는 인(仁)

‘자포(自暴)’는 스스로를 해치는 것이고 ‘자기(自棄)’는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다. ‘나 포기할래, 못하겠어’라는 한 마디가 스스로에 대한 폭력이자 방기라는 말. 게다가 자포와 자기는 인, 의, 예 즉 본성을 거스르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맹자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정말 할 수 없는 것인가 묻는다. 「양혜왕」편에서 읽었던 ‘불능(不能)’과 ‘불위(不爲)’가 떠오른다. 큰 산을 옆구리에 끼고 바다를 훌쩍 뛰어넘는 일은 ‘할 수 없음’에 속한다. 그건 누가 뭐래도, 다시 태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어떤가? 옆에 거동이 불편하신 노인이 있다. 노인을 위해서 나뭇가지를 꺾어 지팡이를 만들어 드리려고 한다. 이 정도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면 이는 ‘할 수 없음’인가 ‘하지 않음’인가?

우리가 말하는 대부분의 ‘할 수 없음’이 ‘하지 않음’이 아닐까. 그런 의미라면 ‘불인(不仁)’은 먼저 한계를 긋고 스스로를 왜소하게 만드는 것이다. ‘글고평’의 1년 과정 전체와 집안일, 개인적인 일정들을 생각하면 거대 산이 되어 나를 압박한다. 마치 태산을 끼고 북해를 건너는 일만큼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노인을 위해서 지팡이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나씩,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그렇게 매번의 인을 실천하기.

할머니 지팡이

‘글고평’을 하지 않는다면? 더 마음을 내서 몰입을 요하는 공부의 문턱을 넘어보지 않겠다면? 더 힘을 쓰지 않아도 되는 세미나 두세 개 정도만 하는 것으로? 오오..상상만 해도 편안해진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있게 집안일과 주변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공부 때문에 못 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친구들도 만나고 여행도 다니고 재테크도 하고 운동도 하고-도 하면서. 딱 재미있을 만큼만 공부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정말 좋을까? 지금까지 공부해온 과정을 가만 되짚어보니 조금 더 공부하기를 원했던 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첫 시간이 떠오른다. 『장자』였다. 오상아(吾喪我), 곤(鯤)과 붕(鵬)의 이야기를 듣는데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게 울컥 올라왔다. 고전에 대한 선생님들의 색다른 해석에 매료되어 이런 공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실에서 읽는 책들은 녹록치 않다. 늘 힘겹게 읽어가고 무슨 뜻인지 모를 때가 다반사. 그렇지만 책이 던져주는 질문들이 계속 공부하게 만든다. 고대인들의 삶은 근대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의 눈으로 보면 참 이상하다. 그 낯섬이 소유와 축적, 도덕과 행복의 척도 등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 균열과 흔들림은 분명 당혹스럽다. 이걸 모르고 살면 어쩔 뻔 했어,라며 놀랐다가도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살던 대로 살자며 자포자기의 심정이 될 때가 많았다. 그래도 다시 마음을 돌이켜 계속 공부의 길에 있는 것은 인을 향하는 마음 때문인 것 같다.

빛이 들어오는 길

집안일과 공부 사이에서 허덕이며 온 것 같았는데, 배움의 기쁨이 내 삶을 이끌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공부 때문에 이런저런 것들을 못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공부가 주는 감흥이 더 커서 이런저런 것들을 뒷전으로 미룰 수 있었다.

이제는 좀 더 밀도있게 고전과 접속하고 ‘글쓰기와 존재적 성찰을 연결’해야 할 시점이다. 제대로 읽을 수 있게 훈련할 수 있는 기회, ‘심층에 잠들어 있는 글쓰기 세포, 말의 유전자를 과감하게 일깨’울 수 있는 기회. 인할 수 있는 기회인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글고평’을 통해 내가 인할 수 있는 길은 피하지 않고 이 과정을 온전히 겪는 것이다. (작은 따옴표는 ‘글고평’ 리플릿에서 인용)

또 하나. 이 글을 준비하며 썼다가 지운 많은 ‘날린’ 부분들이 뭔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내’ 가족, ‘내’ 친구, ‘내’ 공부, ‘내’ 삶 등 ‘나’에 머물러 있는 마음이 번뇌를 낳고 자포자기를 유발한다는 사실이다. 나와 너를 가르는 마음의 틈을 헤집고 비교, 절망, 우쭐, 질투의 감정이 들어오고 그게 번뇌의 씨앗이 되고 자포자기를 낳는다. 그래서 이번 ‘글고평’에서는 나에 갇히지 않고 나를 확장시키는 공부가 되었으면 한다. 확장의 시작을 ‘섞임’으로 해보면 어떨까? 나의 공부와 학우들의 공부가 섞이는 훈련으로.

‘글고평’이 걱정과 두려움으로 다가온 원인 중 하나는 나의 부족함과 모자람이 드러나는 데에 대한 자의식 때문이다. 하지만 부족한 거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모르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고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드러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내면 어느 곳에서도 배움이 일어난다. 그 배움을 기쁘게 여길 줄 안다면 그곳이 곧 인이 거하는 ‘편안한 집’이 아닐까?

편안한 여우

친구가 공부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들을 전해주니 이 또한 기쁨이다. 왜 그게 꼭 나여야 하는가? 친구의 깨달음이 나에겐 고마움이다. 그럼 다음엔 내가 이 기쁨과 고마움을 친구들에게 전해주고 싶어질 것이다. ‘글고평’은 이렇게 인할 사람이 될 기회다. 이런데도 자포자기하고 싶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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