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숙(감이당)

‘말’이 만드는 세상

예전에 ‘돈’이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다. 영화 제목이 강렬하여 (‘돈’이지 않은가^^)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다. 그 당시 유식에 흥미를 두고 있던 터라 ‘돈’이라는 말이 어떻게 주인공의 세상을 만들어 가는지가 눈에 들어왔다. 영화 속 주인공은 ‘돈’이 가장 핫하게 거래되는 증권사의 브로커로 입사한다. 일단 이 대목부터 눈에 띄었다. 주인공이 증권사에 입사했다는 것은 주인공의 심층의식에 ‘돈’이라는 말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명언종자로 저장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명언의 힘이 세상의 수많은 현장 중에서도 돈이 가장 많이 유동하는 현장으로 발을 들이게 했다. 그런데 마음처럼 돈이 벌리지 않는다. 빽도 줄도 없이 입사한 주인공은 실적이 거의 없자 해고의 위기에 몰리는데, 이때 알 수 없는 사람이 접근해서 위험한 거래를 제안한다. 주인공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흔들린다. 심층의식에 저장된 ‘돈’이라 말이 다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불법 거래 덕에 주인공은 순식간에 큰돈을 벌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위험한 거래에는 반드시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는 법.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자신은 협박을 받기 시작한다. 친했던 친구와도 사이가 벌어지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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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우리 속에 저장되어 강력한 인연을 만드는 ‘말’과 그 말에 의해 바뀌는 세상을 생각했다. 우리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는 수많은 말 중에 유독 우리를 흔들어대는 말이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돈’이라는 말이 가장 강력하게 우리를 흔든다. 영화 속 아슬아슬한 주인공의 삶을 보면서, 부자가 되고 싶다,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속에 있는 ‘돈’이라는 말이 외부 인연과 만났을 때 어떤 세상을 만들어 내는지 흥미로웠다. 주인공은 ‘돈’이란 말에 끌려 증권사를 선택하고, ‘돈’이란 말에 끌려 위험한 거래를 한다. 그때마다 인연의 장(場)은 바뀌고, 주인공이 살아가는 세상도 바뀐다. 심층의식 속에서 가장 강력하게 힘을 발휘하고 있는 말이 그 사람의 세상을 만든 것이다. 영화 마지막 즈음에,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주인공은 마음을 돌린다. 자신이 선택한 것들이 어떤 현실을 만들고 있는지, ‘돈’이라는 말에 딸려오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본 것이다. 주인공은 그제야 ‘돈’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한다. ‘돈’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미소 짓던 주인공의 마지막 얼굴은 앞으로 그가 사는 세상은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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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돈’이란 말에 끌려 증권사를 선택하고, ‘돈’이란 말에 끌려 위험한 거래를 한다. 그때마다 인연의 장(場)은 바뀌고, 주인공이 살아가는 세상도 바뀐다.

언어(말)는 사물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인간은 뇌 용량이 증가하면서 언어를 사용하는 정신능력이 향상되었다. 이는 아뢰야식의 ‘명언종자’가 활성화되었다는 것.(앞 연재 참조) 명언은 말(언어)이라는 의미이다. 명언종자가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다는 것은 “언어가 우리들의 인격 속에 축적되어” 있고, “언어에 의지하여 사물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 김명우 지음 참조)한다는 것이다. 인격은 ‘한 개인이 자신을 지속적이며 통합적인 자아로 의식하는 작용’(네이버사전 참조)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속적이고 통합적인 ‘나’를 인식하는 것, 그리고 지속적이고 통합적인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 인격 속에 축적되어 있는 언어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는 어떻게 우리의 인격 속에 축적되는 걸까?

언어는 분별이다. 언어는 보편적 형상을 갖는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다. 인간의 정신의 능력, 그 중에서도 ‘같은 이름을 붙여 보편적인 것으로 의미화’ 하는 인간의 능력은 비슷해 보이는 것을 뭉뚱그려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이다. 이것을 불교의 오온(五蘊)으로 표현하면, 인간의 감각기관(몸, 色)에 들어오는 수많은 다양한 것들(느낌, 受) 중 비슷하게 보이거나 들리거나 냄새 맡아지는 것을 뭉뚱그려(이미지, 想) ‘이것’ 또는 ‘저것’이라고 같은 이름을 붙여 보편적인 것으로 의미화한 것(의도, 의지, 行)이 언어이다. 그러니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것(此)’은 ‘저것(彼)’과는 다른 것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구별한다는 것이다. 차이를 뭉뚱그려 보편화한 후, ‘이것’ 또는 ‘저것’이라고 이름붙이며 탄생한 언어. 인간이 진화하면서 경험하는 수많은 차이를 비슷한 것으로 뭉뚱그려 보편화하고 그것에 이름 붙여 ‘이것’이라고 한 언어는 세대에서 세대를 거치며 인간의 깊은 의식 속에 저장된다. 느끼고(受), 이미지화(想)하고, 보편화 한(行) 모든 것은 인식(識)을 통해 아뢰야식에 저장되고, 이 저장된 것은 세대를 거쳐 다음 세대에 분별의 근거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격 속에는 수많은 시간 동안 ‘이것’ 또는 ‘저것’이라고 이름 붙여 보편화 한 것들이 축적되어 있다. 이렇게 축적된 언어로 우리는 자신을 지속적이고 통합적으로 분별하고, 세상 또한 지속적이고 통합적으로 분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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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고(受), 이미지화(想)하고, 보편화 한(行) 모든 것은 인식(識)을 통해 아뢰야식에 저장되고, 이 저장된 것은 세대를 거쳐 다음 세대에 분별의 근거로 작용한다.

여기서 『산해경』 얘기를 잠시 해보겠다. 고대 중국의 지리를 다루는 『산해경』에는 기이한 동물들이 많이 나온다. 사람과 물고기가 조합된 동물, 사람과 새가 조합된 동물, 사람과 뱀이 조합된 동물 등. 지금으로썬 괴물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동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 기이한 동물들을 보면서, 이들은 모두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식을 공부하다보니, 그런 동물들은 인간 정신이 외부 세계를 인식하여 보편화하는 과정에 생겨난 동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 새, 뱀은 인간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동물들이다. 지금과는 다른 인지 능력(분별 능력이 더 적은)을 가졌을 인간에게 인간과 물고기, 인간과 새, 인간과 뱀은 모호한 경계 속에서 하나인 듯 둘인 듯 존재했다. 그 모호한 경계를 하나의 형상인 냥 표현한 것이 『산해경』 속의 동물인 것이다. 그러니 『산해경』 속 동물들은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그 당시 그 사람들에겐 실재했던 동물들인 것이다. 그들의 언어 즉 분별의 감각 속에서는 실재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사물을 순수한 감각 기관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로도 보거나 듣는”(『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 김명우 지음 참조)다. 그런데 이 순수한 감각 기관조차 그전에 사용된 언어에 의존하여 사물을 인식한다. 그러니 사물은 누가 보더라도 똑같은 형상, 똑같은 소리로 보이거나 들리는 것이 아니다. 즉 사물은 그 자체로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떤 언어를 축적하고 있느냐에 따라 실재로 다르게 보이고 들린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인간과 동물에 대한 분별인식이 낮았던 『산해경』 속 사람들에게 인간과 물고기, 인간과 새, 인간과 뱀이 조합된 동물들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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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언어를 축적하고 있느냐에 따라 실재로 다르게 보이고 들린다는 것이다.

말에서 생겨난 말로 된 세상

유식은 명언종자를 두 종류로 나누는데, 하나는 현경(顯境)명언이고, 다른 하나는 표의(表義)명언이다. 현경명언은 “경(境)을 요별하는 심법과 심소법”이고, 표의명언은 “의미를 표현하는 음성의 차별”(『유식삼십송 풀이』 참조)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현경명언은 “명확하게 언어로 나타낼 수 없는 이미지나 인상(印相) 등과 같은” 것이고, 표의명언은 “명확하게 의미를 나타내는 언어”(『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 참조)이다.

여기서 ‘현경명언’이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현경명언은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경계, 즉 우리가 세계라고 인식하는 모든 이미지나 인상이 언어라고 말하고 있다. 하늘, 땅, 나무, 산, 고양이, 커피향, 된장 맛, 키보드의 딱딱한 촉감 등 무엇을 떠올리든, 우리의 전5식으로 감각하여 구별 지을 수 있는 것(了別)은 무엇이나 언어라는 것이다. 책상을 볼 때, ‘책상’이라는 말을 떠올리기 전에 눈에 보이는 책상의 형상 그 자체가 이미 언어라는 것이다. 하늘을 볼 때도, ‘하늘’이라는 말을 떠올리기 전에 눈에 보이는 하늘의 형상 그 자체가 이미 언어이고, 새소리를 들을 때 ‘새소리’라는 말을 떠올리기 전에 들리는 소리 그 자체가 이미 언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연암 박지원은 “우주 만물은 단지 문자나 글월로 표현되지 않은 문장”이라고 했는데, 유식은 우주 만물은 그야말로 ‘말’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인격 속에 축적된 언어대로 세상을 이미지화하고 인상하기 때문에 ‘현경명언’이다. 『산해경』에 나오는 기이한 동물이 그 시대 사람들에겐 실재하는 것으로 기록되는 것은 이 ‘현경명언’의 작용 때문이다. 반면, ‘표의명언’은 보이는 형상, 들리는 소리 등에 그 의미를 나타내는 보편화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책상의 형상에 ‘책상’이란 이름을, 하늘의 형상에 ‘하늘’이란 이름을, 새소리에 ‘새소리’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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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유식에 흥미를 느낀 것은 ‘명언종자’라는 말 때문이었다. 고정되어 있고 실재하는 것처럼 경험되는 이 세상이 사실은 내 깊은 의식(아뢰야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명언종자 때문에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경험된다는 유식의 논리는 놀라웠다.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가 제7 말나식, 제6식, 전5식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며(종자생현행) 내가 사는 세상을 현현하고 있으니, 종자는 내가 사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유식에 의하면, 우리가 이전에 반복적으로 행한 말(언어)의 기운(명언종자)은 우리 인격 속 어딘가에 축적되어 지금 사물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할 때마다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전에 내가 썼던 말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만드는 씨앗이 되고,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말은 앞으로 내가 사는 세상을 만드는 씨앗이 된다.

씨앗은 아주 작다. 하지만 콩이라는 작은 하나의 씨앗은 수백수천의 콩이 될 가능성을 담고 있다. 작은 콩 하나가 수백수천의 콩을 탄생시키고, 이 콩들은 저마다의 인연으로 또 다른 콩들을 탄생시키며, 어느새 콩의 세상을 만든다. ‘돈’이라는 영화에서, ‘돈’이라는 작은 말의 씨앗이 증권사, 위험한 거래, 죽음 등의 세상을 만들 듯…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쓰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내가 어떤 세상을 살아 왔는지 그리고 어떤 세상을 살 것인지를 아는 것과 같은 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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