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찬영(감이당)

火地晉(화지진) ䷢ 

晉, 康侯用錫馬蕃庶, 晝日三接.

진괘는 나라를 안정시키는 제후에게 말을 많이 하사하고, 하루에 세 번 접견하는 것이다.

初六, 晉如摧如, 貞吉, 罔孚, 裕无咎.

초육효, 나아가거나 물러남에 올바르면 길하다. 주변에서 믿어 주지 않더라도 여유로우면 허물이 없다.

六二, 晉如愁如, 貞吉, 受玆介福于其王母.

육이효, 나아가려다 근심하는 것이지만 올바름을 지키면 길하니 왕모(육오)에게서 큰 복을 받는다.

六三, 衆允, 悔亡.

육삼효, 무리가 믿고 따르니 후회가 없어진다.

九四, 晉如鼫鼠, 貞厲.

구사효, 나아가는 것이 다람쥐와 같으니 계속 고수하면 위태롭다.

六五, 悔亡, 失得勿恤, 往吉, 无不利.

육오효, 후회가 없게 된다. 득실을 근심하지 말아야 하니 나아가면 길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다.

上九, 晉其角, 維用伐邑, 厲吉, 无咎, 貞吝.

상구효, 그 뿔에까지 나아가니 오직 자기 자신을 강하게 단속하는 데에 사용하면 엄격하더라도 길하고 허물이 없다. 하지만 올바름의 측면에서는 부끄러움이 있다.

“너는 언젠가 스스로 집을 떠날 거야. 더는 우리 곁을 견딜 수 없을 때가 올 거다.” 언젠가 ‘평생 부모님이랑 같이 살겠다’고 선언했던 어린 나에게 아버지가 덤덤하게 답하던 말이 기억난다. 과연 그 예언은 한 치의 오차 없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확신에 찬 호언장담이 민망할 정도로, 20대 중반에 접어들자 나는 본격적으로 독립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이 힘들어진 때가 찾아온 것이다. 마침내 재작년, 아주 작정하고 가족의 품을 떠나 세상에 스스로를 내던졌다. 오붓했던 나만의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와 홀로 엄벙덤벙 하루하루를 꾸려나가느라 바쁜 요즘에도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나처럼 부모님의 곁이 불편해졌지만, 차마 세상에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이 땅 위 캥거루족 청춘들의 안부가! 이제 막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나도, 또 나아감을 꿈꾸고 있는 다른 이에게도 건네줄 수 있는 지혜 한 조각을 주역에서 건져볼 수 있지 않을까? 화지진(火地晉) 괘가 여기서는 안성맞춤일 듯싶다.

땅 위에 태양이 환하게 자리 잡고 모든 것을 환히 비추는 화지진 괘는 아주 밝은 와중에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괘가 놓인 순서가 재밌는데, ‘강성해지면 반드시 나아가게 되어있(699쪽)(『주역』, 정이천 지음, 심의용 옮김, 글항아리, 2015)어서, 양효가 아래에서 힘껏 치솟아 오르는 뇌천대장 괘 다음으로 나아감을 뜻하는 화지진 괘가 자리한다. 머리가 크고 어느 정도 성장한 청년이 이제 세상으로 당차게 나아가는 모습이 저절로 그려진다. 한창때의 청년은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길 원하며 과감하게 세상을 향해 출사표를 던진다. 출사표가 무엇인고 하니, 그 유명한 제갈량이 전투에 임하며 왕께 올린 글이 아니던가? 전쟁(師)에 출정(出)하며 남긴 산문(表)인 것이다. 가족을 떠나 새로운 방향성을 품고 나아가려는 청년들에게 있어서 출사표를 던지는 그의 마음과 태도는 본받을 것이 많다. 세상에 나아간다는 것은 분명 전쟁터에 임하는 군사처럼 단단한 마음과 태도는 물론이요, 도대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전략과 구상 또한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름의 출사표를 던지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나도 늘 내가 어디로, 또 어떤 마음을 품으며 나아가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마치 답안이 없는 시험지를 헤매는 것처럼 모든 것을 혼자 결정 내리고 꾸려나가야 하는 현실은 여전히 어렵고 녹록지 않다. 가장 두려웠을 때는 집을 구하러 다녔을 때였다. 월세를 구하려니 월급의 1/3은 그대로 뚝 떨어져 나가고, 전세를 구하자니 기사에 하루가 멀다하고 오르내리는 ‘전세 사기’, ‘깡통 전세’ 같은 헤드라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평생 손에 쥐지도 못할 금액의 보증금을 대출하려고 인터넷에 정보를 이 잡듯 뒤지고 백방으로 은행을 뛰어다니며 계약서를 작성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헤쳐나가는 동안 뿌듯함보다도 막막한 두려움이 앞섰다. 앞으로 최소 2년을 주기로 계속 이사 다니며 길 위를 헤매야 한다니! 도통 남 일이라 생각했던 요즘의 재테크 열기가 갑작스레 와닿는 순간이었다. 어디 집 문제뿐인가? 통 야무지지 못하고 어색한 살림살이 능력을 확인할 때마다 자신감은 속절없이 삐걱거렸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 해도 집을 떠나 세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금전적인 손해에 더해 전전반측하는 마음 졸임까지, 치러야 할 대가가 훨씬 더 컸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계산기는 나를 불안과 걱정의 회로 속에 자꾸만 밀어 넣었다. 한마디로 나아감은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과 냉정한 현실을 마주하는 불안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뭣도 없으면서 괜히 나온 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로 뒤척이던 밤이 내게도 몇 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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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를 작성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헤쳐나가는 동안 뿌듯함보다도 막막한 두려움이 앞섰다.

육오효 또한 진퇴양난이다. 아래로 내려가 사람들을 만나려고 해도, 위로 높이 올라가려 해도, 강한 기운이 위아래로 가로막고 있기(上九, 九四) 때문에 운신이 어렵고, 또 자리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후회가 있다. 그러나 이 후회는 곧 깨끗하게 사라질 수 있다(悔亡). 어떻게? 화지진 괘의 육오효가 건네는 그다음 말은 더더욱 중요하다. 실득물휼(失得勿恤)! 얻고 잃음을 걱정하지 말라! 예전부터 화지진 괘를 암기할 때마다 이 네 자의 단어를 이유도 없이 무척 좋아했는데, 아마 평소 계산기를 열나게 두드리고 손익계산서 작성에 익숙한 내 전공(경영학)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이라서 그렇지 않았나 싶다. 유독 육오효가 이리저리 계산하면서 실득을 걱정하는 위치일 수밖에 없는 것은 리(離)괘의 정 가운데에 위치하여 상황이 불 보듯 환히 보이는 자리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직접 뛰어들어 보니 속속들이 드러나는 현실적 조건은 사람을 번뇌에 빠뜨린다. 그러나 리괘가 가진 능력, 실상을 명징하게 비춰볼 수 있는 이 장점을 조금 다르게 쓸 수는 없을까? 어렵지만 그래도 대면한 현실, 거기서 내가 얽혀있는 괴로움을 구석구석 뜯어보고 한발이라도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지혜로서 이 중천의 태양을 쓸 수는 없겠는가 하는 말이다.

육오효는 밝은 지혜를 상징하는 리괘의 중심이자 군주의 자리에 앉아 있다. 따라서 이 효는 분명히 자신만의 지혜를 창출할만한 능력이 있다. 그래서일까? 화지진 괘의 조언은 독특하게 느껴진다. 상황이 불안하고 미래를 알 수 없으니 영혼까지 싹싹 끌어모아 대비하라거나, 잃는 것을 최소화하라는 게 아니다. 그저 잃고 얻음을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실득을 재고 따지는 연장선 위에서 안달복달하지 말고, 아예 실득에 대한 마음 자체를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이런 의연함은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이 지점에서 태양의 밝은 눈을 다른 식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단편적인 계산이 아니라, 나아감과 머묾, 시기와 인연 등 다양한 차원에서 나아감을 바라볼 수는 없을까? 게다가 오효는 높은 곳에서 괘 전체를 조망하기에 제격인 자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실득을 조금 더 큰 그림으로 관찰하는 자세가 여기서 필요하다. 달마다 끊어서 적는 가계부에는 마이너스와 플러스의 숫자를 가늠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세상은 언제나 가계부 이상의 무언가로 넘실거린다는 걸 깨닫는다면, 물휼의 마음도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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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계산이 아니라, 나아감과 머묾, 시기와 인연 등 다양한 차원에서 나아감을 바라볼 수는 없을까?

나 같은 경우, 세상으로 나아가며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잃었지만, 확연히 달라진 인연의 장 속에서 삶의 진폭은 훨씬 넓어졌다. 돌아보니 잃음과 얻음의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잠깐 머무는 듯했다가 또 흘러간다. 지금 내 삶 속에서 나를 지나쳐가는 동시에 또 새로운 마주침을 몰고 들어오는 흐름을 전체적으로 감지하기. 이것이 바로 실득물휼의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화지진 괘의 군주 또한 마찬가지다. 괘사에서 그는 하루에도 세 번이나 제후를 불러 정사를 논하는데(晝日三接), 천하를 위해 일하며 새로운 사회적 관계망을 다지는 것이 그의 일이 된다. 이것은 군주의 나아감이다. 이제 막 나아감을 시작한 나의 상황과 군주를 비교하기에는 아주 민망하지만, 그래도 내가 세상으로 발을 디디며 진 괘 군주의 상황과 엇비슷하게 겪은 사소한 변화가 하나 있다. 나는 이제 더 많은 친구뿐만 아니라 얼굴도 모르는 보편적인 사람들을 상정하고 그들의 안녕을 궁금해하며 또 걱정하며 공부와 글쓰기를 이어나간다. 이것만 봐도 내가 ‘인간’과 ‘관계’에서 기꺼이 포함하는 인식의 대상은 확실히 더 많아지고 넓어졌다. 세상으로의 나아감이란 이렇게 자신이 전제할 수 있는 인연의 한계를 마침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더 멀리, 더 늘리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다. 그 속에서 어떤 실득이란 찰나의 순간에 아주 잠깐 포착되는 것일 뿐이라는 물휼의 깨달음이 있다. 계산기를 돌리며 끊임없이 불안을 재생산하는 건 이런 깨달음 속에서 완전히 무의미해진다.

나는 여전히 허둥대고 기약 없이 헤매며 미숙한 나아감을 계속하겠지만, 다시 가족의 품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나아가는 것은 땅 위의 태양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것처럼 분명히 옳은 방향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내게는 자리하고 있다. 실득에 대한 걱정을 내려둔 채 과감히 나아가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믿음이다. 만약 시기를 가늠하고 있는 청년이 있다면, 더 큰 연결을 원하는 청춘만의 직감을 따라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계산기만 끼고 앉아 있기에는 태양의 밝음이 보여주는 이 넓은 세상이 아쉽다. 나아감은 손에 잡히지도 않는, 측정 불가능의 그 무한함을 경험하겠다는 결심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과감한 출사표를 내던지기. 그렇다, 세상이 어쩌면 잃을 것들로만 가득한 두려움의 장일지 몰라도, 계산을 넘어서는 물휼의 통찰력은 이 전쟁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그냥 길한 것이 아니라, 나아가면 길하여 불리한 것이 없다(往吉, 无不利)는 육오효의 자신만만한 선언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니 나아가시오! 세상이 거기에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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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나아가시오! 세상이 거기에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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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훈
재훈
3 months ago

이 세상에서 나와 비슷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동료(특히 청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 만으로, 공부를 해 나가는 데에 큰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Last edited 3 months ago by 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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