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3부. 슬기로운 유배생활(2) - 용장대오? 용장생활백서

문리스(남산강학원)

(사)물과 마음이 함께 있다(정확히는 ‘마음 밖에 있는 (사)물은 없다’)는 양명의 말은. 어딘가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물리 법칙을 위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현대와 과거의 문제도 아닙니다. 양명의 생각은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겼기 때문입니다. <전습록>을 보면 양명의 격물설에 당혹스러워하는 동시대 학자들의 일그러지는 미간 주름이 무시로 보입니다. 특히 주자학자들에겐 더욱 그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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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유학의 사유를 공부하다보면 아이러니 같은 것이 있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주자학은 과거 전근대적 인식의 대명사입니다. 반근대의 대표격인 셈입니다. 하지만 근대 이전 주자학은 상당히 세련되고 성숙한 학문이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지성으로 세상을 이해하겠다는 생각 위에 있습니다. 우리는 동아시아 한자 문명권에 보이는 이 모습을 ‘송(宋)’나라의 리학(理學)이라고 부릅니다. 주자가 존숭했던 북송의 대학자 정명도는 하늘(天)도 결국 하나의 이치(理)일 뿐이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전근대 세계를 지금보다 비합리적이고 혹은 신비적인 어떤 걸 신봉하던 미신적 세계라고 오해하는 것에는 상당히 의도적이고 뿌리깊은 적대감이 가려져 있습니다.

격물(格物)의 격(格)자는 오늘날 격식, 격자 등에 쓰이는 말입니다. 양명으로부터 이 말은 ‘바르게하다’(正)는 의미를 얻게 되었는데, 이 해석은 양명 특유의 천재성(독창성)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양명은 이에 대한 전고를 <맹자>로부터 끌어옴으로써 단지 개인적 해석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저는 지난 십수년래 양명학을 만나오면서 ‘격물’이란 말을 어떻게든 다른 말로 풀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양명의 해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제 자신의 공부를 위해서는 새로운 맥락을 포함하는 언어적  횡단이 매우 중요한 실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하여 보통은 늘 <전습록>에 실린 예들을 통해 설명하거나, 이런 저런 부언들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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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격(格)은 우리가 아는 가장 기본적인 용례에 남아있는 ‘격자(틀)’ 같은 것입니다. 요컨대 격은 틀, 프레임(frame)입니다. 격물은 물(物)을 격자화하는 것입니다. 물을 격자화한다는 건, 물을 물이 되게한다는 뜻입니다. 말장난이 아닙니다. 격자화를 통해 비로소 물은 물이 됩니다. 다시 말해 물을 물로 보는 것이 격물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물(物)은 ‘물이 되어야’ 합니다. ‘물이 된’ 것만 물(物)입니다.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 하면 우리가 눈이 있다고 보고, 귀가 있다고 듣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눈은 보는 기관이고 귀는 듣는 기관이지만 눈은 눈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보지 않습니다. 귀는 듣는 기관이지만 주위의 모든 소리를 모두 듣지 않습니다. 왜 때문에?

<대학>에서 말하는 몸[]은 곧 귀, 눈, 입, 코와 사지이다. 몸을 닦고자 하는 것은 바로 눈은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귀는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입은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사지는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몸을 닦고자 한다면 몸에서 어떻게 공부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란 몸을 주재하는 것이다. 눈이 비록 보지만 보게 하는 것은 마음이고, 귀가 비록 듣지만 듣게하는 것은 마음이며, 입과 사지가 비록 말하고 움직이지만 말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마음이다, 그러므로 몸을 닦고자 하면 자신의 심체를 체득하여 항상 탁트여 공평하고 조금이라도 바르지 않은 점이 없도록 해야한다. 주재하는 것이 일단 바르기만 하면, 그것이 눈에 드러나서 저절로 예가 아닌 것을 보지 않게 되고, 귀에 드러나서 저절로 예가 아닌 것을 듣지 않게 되며, 입과 사지에 드러나서 저절로 예가 아닌 말과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몸을 닦는 것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이다. (<전습록>317조목)

우리가 늘 다니던 길을 한 번 상상해 보죠. 그 길을 가고 올 때, 예컨대 아침 저녁 지나치는 출퇴근길 혹은 학교나 시장 혹은 도서관 등을 다녀오는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눈이 있지만 길 위의 모든 것을 다 보지 못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책을 보다보면 희한하게도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제가 책을 볼 때 주변 사람들이 조용히 해주는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겠죠. 그러니까 일단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볼 수 있는 것과 보이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양명의 말을 빌리자면, ‘눈과 귀가 보고 들으려고 할 때 보고 듣게 하는 것은 눈과 귀가 아니라 마음’인 것입니다. 지금, 저만 흥미롭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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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 이전의 유학, 즉 주자학으로 대표되는 송대 유학에서는 이치로서의 세상(천지/ 자연)에 주목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물리 법칙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합리주의(‘리학(理學)’)의 길이었습니다. 주자학에서 격물이란 물(物)에 나아가는(혹은 이르러 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물에 나아가냐 하면 세상은 각각의 물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고, 그 물 각각에는 저마다 고유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그 물의 이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아가 탐구(궁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자학에서 말하듯 격물이 (사)물에 나아가 도달하는 것이라 하게 되면, 세계는 이해가능한 대상으로 명석 판명하게 구축될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 실존(몸을 가진 이 나)은 세상으로부터 절연되어 버리고 맙니다. 즉 이치를 가진 세상과 이치를 탐구하는 나로 이원화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달하려고 해도 결국 세게는 세계, 나는 나인 것입니다. 이것이 십대 후반 주자의 격물설에 크게 감화받은 양명이 대나무(라는 대상/세계)의 이치에 격(도달)하고자 했을 때의 상황입니다. 당시 양명의 실패는 대나무의 이치 획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와 대나무의 이치를 탐구하는 이 몸으로서의 나 사이에 끝내 넘을 수 없는 어떤 단절감 때문이었습니다. 하여 이십여년이 지나 이제까지 자신에겐 대상(경계선 너머의 세계)일 뿐이었던 용장에 들어가서야 양명의 질문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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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 양명의 획기성은 주자의 격물설에서 물의 ‘물-됨’을 질문했다는 데 있습니다. 누구나 자명하게 생각한 지점에서 다시 질문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격물은, 제가 보기엔 일종의 낯설게하기입니다. 예컨대 문학(혹은 예술)에서 작가는 장면 혹은 인물 혹은 기타 문학적 창조의 과정에서 기존의 관습적인 사유 혹은 언어를 낯설게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창조합니다. 이제까지 없던 것에서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무언가를 (신처럼) 새로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있었던 것을 이제까지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낯설게)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물론 양명의 물이 현대 예술가들의 낯설게하기처럼 어떤 기법이라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물이라고 해도 그것이 물이 되어야 물인 것이라는 것, 양명의 격물 해석은 그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글을 보는 이 순간 각자의 자리 주위에 있는 무엇이든 보고 이름을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제 경우엔 이 글을 쓰는 지금 창 밖에 내리는 비가 보입니다. 창틀에 내놓은 작은 화분들이 가냘픈 잎들이 비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비님, 홍자씨(홍콩야자), 태자씨(테이블야자)… 제가 이렇게 이름을 부를 때 봄비와 홍콩야자와 테이블야자는 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물을 물로 격자화하다는 뜻입니다. 이 간단한 결론을 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느냐 하면, 양명학에서라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격물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격물, 즉 물을 물로 격자화하는 것, 이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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