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숙(감이당)

트롯이 ‘좋다’

작년 추석에 트롯이 나오는 가요 프로그램을 봤다. 인기 있는 프로라고 익히 들어왔지만 한 번도 본 적은 없었다. 추석날 달리 볼 것은 없고, 시댁 어르신들이 워낙 재미있다고 하시니 틀어놓고 있었다. 근데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이 이상해졌다. 마음이 야리야리해진다고 해야 하나? 급기야 기억나지도 않는 어린 시절의 풋풋했던 느낌들이 생각나면서 왜인지도 모른 채 눈물이 그렁거리는 것이었다. 음악이란 원래 이런 것이었나? 처음엔 노래의 음율과 가사에만 집중하다가 나중엔 그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점점 궁금해졌다. 그래서 “저 가수가 누구예요?”하고 한마디 물었을 뿐인데, 시어머님과 아버님은 그 가수의 학창 시절, 가정 형편, 가수가 된 경위 등을 줄줄 얘기하시는 거였다. 놀라웠다. 얼마 전 친정어머니와 전화 통화할 때 “000(트롯 가수)이가 잘살아야 할 텐데, 걱정이다.” 하시며, 대화의 반을 000이 얘기를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땐 그저 트롯이 대세긴 대세인가 보다 생각했다. 근데 유식을 공부하다 보니, 이 상황이 우리가 사는 욕망의 세계(欲界)를 참 잘 표현해 준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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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삼계(三界)를 얘기한다.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이다. 욕계는 욕망의 세계이고, 색계는 색(色), 즉 형상(물질)의 세계이고, 무색계는 색이 없는, 즉 정신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우리 인간은 삼계 중 욕계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욕계는 욕망에 매여 사는 세계를 의미한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은 욕계에서만 사는 것은 아니다. 물질적 기반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색계에 살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욕망과 물질을 넘어선 정신 작용도 있으니 무색계에 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동시에 살면서도 욕망에 초점을 맞춰 산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욕망에 ‘초점을 맞춰’ 산다고 했지만, 사실 이것은 능동적 행위의 표현이다.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필요할 때는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니까. 하지만 우리의 삶은 욕망에 ‘매여’ 있는 삶이다. 욕망을 능동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그것에 수동적으로 붙잡혀 사는 삶. 그것이 ‘인간은 욕계를 산다’는 의미이다. 늘 욕망에 매여 살다보니, 우리가 어떻게 욕망에 빠져드는지 그 과정을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추석 날, 트롯 프로를 보면서(^^;), 내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욕망의 세계로 깊숙이 빠져드는지 그리고 거기에 매이게 되는지 그 과정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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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세계, 이름으로 붙잡다

색계는 물질의 세계이다. 물질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것으로 감각된다. 모든 생각(관념, 판단 등)을 버리고, 오로지 ‘봄’ 자체, ‘들음’ 자체, ‘냄새 맡음’ 자체, ‘맛’ 자체, ‘감촉’ 자체를 감각하는 것은 색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니 트롯 음악을 듣는 것은 소리(聲)라는 색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소리 자체는 어떤 인연에 의해 생긴 것인지 모른다. 트롯 프로, 텔레비전, 추석, 시어머님과 아버님, 가수 등 수많은 인연의 결합에 의해 생겨났다. 여기서 ‘생겨났다’는 것은 내 앞에 그 소리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긴 소리를 인식할 때 우리는 (의식하든 의식 못 하든) ‘내가’, ‘소리를 듣는다’는 개념을 가지고 경험한다. 이를 유식에서는 이취습기(二取習氣)라고 한다. ‘소리’ 자체인 색의 세상을 우리 마음이 듣는 주체인 ‘나’와 듣는 대상인 ‘소리’로 나누어 경험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현상을 주체인 ‘나’와 객체인 ‘소리’로 습관적(習)으로 취(取)하여 ‘내가’, ‘소리를 듣는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취습기라는 것. 이취습기는 마음의 세 가지 상태(앞 연재 참조) 중 변계소집성과 관련이 있다. ‘소리’라는 하나의 현상을 두루 분별하여(遍計所) ‘내가’, ‘소리를 듣는다’라고 취한 것(執)이기 때문이다.

둘 아닌 현상이 둘로 나누어지면 ‘봄’ 자체, ‘들음’ 자체, ‘냄새 맡음’ 자체, ‘맛’ 자체, ‘감촉’ 자체로 경험되는 색의 세계는 욕망으로 덧씌워지게 된다. 주체인 ‘나’가 취해지면(取 또는 執), 이 ‘나’를 중심으로 ‘좋다’든가 ‘싫다’든가 하는 분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음악이 아름답게 들리는 건 ‘나에게’ 그 음악이 ‘좋게’ 들리기 때문이다. ‘내가’, ‘소리를 듣는다’는 단계에서는 나(我)와 타(他)의 분별은 있지만, 구체적 욕망은 발동하지 않았다. 그저 ‘나’와 ‘나 아님’으로 세상을 나누어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좋아함과 싫어함이 생기는 것은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나’를 기준으로 다시 분별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트롯이 아름답게 들렸던 것은 ‘나에게’ 좋았기 때문이다. 소리 자체에는 아름답다 또는 아름답지 않다가 따로 있을 리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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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음’이 생겨나면 세상은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싫어하는 것’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은 나의 것으로 곁에 두고 싶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서 밀어내고 싶어진다. 좋아함이 단순히 좋아함을 넘어 갈망의 마음으로 증대된 것을 ‘탐(貪)’이라 하고, 좋아하지 않음이 단순히 좋아하지 않음을 넘어 혐오의 마음으로까지 증대된 것은 ‘진(瞋)’이라 한다. 탐과 진의 마음은 괴로움을 일으키는 주요한 마음작용이다. 트롯 음악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그 음악을 애착하고, 그것을 부른 가수를 좋아해서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넘어 다른 가수를 혐오하는 것은, 탐과 진의 마음작용이다.

그런데 탐과 진의 마음작용이 생기고 유지되는 데는 이름이 작용한다. 우리는 욕망하는 것에 이름을 붙인다.(앞 연재 참조) 좋아하는 것이든 좋아하지 않는 것이든 두루 헤아려서(遍計) 집착한 것(所執)에는 이름을 붙여 그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유지하고자하기 때문이다. 찰나찰나 인(因)과 연(緣)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依他起)을 잡아(執) 고정되고 실재하는 것으로 부여잡고자 하는데 이름(언어)을 사용한다. 그러니 모든 이름에는 우리가 붙잡고 싶은 욕망이 있고, 이름은 그 욕망하는 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예컨대, ‘의자’라는 이름은 ‘앉는다’는 욕망과 함께 존재하며, 이 이름(의자)은 앉는 기능을 가진 실체적 존재로써 의자가 상존(常存)한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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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롯 음악을 듣고 단순히 ‘좋다’를 넘어서,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눈물을 그렁거린 것은 가사 때문이었다. ‘친구’, ‘눈물’, ‘이별’, ‘후회’, ‘어린 시절’ 등은 이미 흘러가버리고 존재하지 않은 수많은 기억들을 파노라마처럼 떠올리게 한다. 그 기억에는 그 시절을 겪었던 감정들이 그대로 묻어 있다. 어르신들이 광풍이라고 할 만큼 트롯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해되었다. 시간은 흘러 나는 늙었지만 트롯 가사는 끊임없이 젊은 시절의 나를 회상하게 한다. 회상은 이미 흘러가 잡을 수 없는 것을 잡고자하는 갈망(탐)의 마음작용이다. 세대 간 소통이 거의 단절된 요즈음 노년은 외롭다. 그 외로움이 같은 시대를 공유했던 음악을 좋아하게 하고, 그 음악 속의 가사가 끊임없이 젊음의 기억을 잡게 한다. 지나가 버려 지금은 없지만, 트롯 가사 속 이름들 속에 내 젊음은 영원히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기억을 유지하게 해주는 트롯 그리고 그것을 부르는 가수에 대한 애착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욕망은 끊임없이 대상을 원하고, 이름은 그 욕망을 붙잡는다.

왜소하게, 그리고 괴롭게

대상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므로 대상에 따라 마음도 늘 일어났다 사라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도 마음은 늘 분주한 것이다. 이 분주함은 좋아하는 것은 나의 것으로 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서 밀어내고 싶은 마음과 함께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렇게 마음이 분별하여 잡은(遍計所執) 대상에 ‘이름’을 붙인다. ‘봄’ 자체, ‘들음’ 자체, ‘냄새 맡음’ 자체, ‘맛’ 자체, ‘감촉’ 자체로만 경험되는 색계에, 나와 대상을 취한 후(二取習氣), 탐과 진의 마음작용이 함께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 욕망의 세계를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름은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붙잡고, 우리의 욕망은 이름으로 지속된다. 무색계, 색계, 욕계를 동시에 사는 인간이 욕망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욕망에 매여 사는 것은 ‘이름(名言)’이 끊임없이 욕망을 부여잡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존재하는 이름들(언어)은 우리들의 욕망을 드러내주고, 내가 사용하는 있는 이름들은 나의 욕망을 드러낸다. 생각해보라, 성도착증 환자는 하루 종일 성과 관련된 생각과 언어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고, 싸움에 대한 욕망이 큰 사람은 전쟁이라든가 무기, 투쟁, 증오 등 싸움과 관련된 생각과 언어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트롯과 관련된 노래 제목들, 가사들, 가수들, 그 가수의 인생들을 표현하는 이름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면 트롯을 통해 재생하고 싶어 하는 나의 삶 어딘가에 욕망이 꽂혀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파트’, ‘재개발’, ‘주식’, ‘비트 코인’ 등이 끊임없이 뉴스를 장식하는 것은 이 시대 돈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 극대화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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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존재하는 이름들(언어)은 우리들의 욕망을 드러내주고, 내가 사용하는 있는 이름들은 나의 욕망을 드러낸다.

우리는 같은 세상에서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각자의 욕망들로 나누어진 저마다의 세상들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저마다의 세상엔 자신들의 욕망을 표현하는 이름들로 둘러싸여 있다. 세상엔 사람의 수만큼 그리고 생명의 수만큼 잘게 나눠진 욕망의 세계가 존재하며, 이들 세계들이 서로 중첩되어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우리가 사는 욕망의 세계이다.

『금강경』을 읽으며 ‘그 이름(是名)’을 사유했을 때, 나는 이 욕망의 원리를 봤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름들은 내 욕망에서 비롯되었음을. 그리고 그 이름으로 내 욕망을 유지하고 있음을. 남편은 남편이 아니라 내가 남편이란 이름으로 잡고자 한 욕망이요. 자식도 자식이 아니라 자식이란 이름으로 잡고자 한 나의 욕망이다. 크다는 작은 것을 대비하여 더 큰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이름이며, 작다는 것은 큰 것을 대비하여 왜소함을 표현하고자 하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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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름이 부여되고, 그 이름의 욕망에 매이는 순간, 우리는 그 이름이 갖는 욕망으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현재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름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 그리고 그 이름들이 잡고 있는 욕망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욕망이 어떻게 갈망과 혐오를 일으키는지 번뇌의 뿌리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시명’을 사유하면서 경험했던 기쁨과 자유의 느낌은 ‘이름’이 잡고 있는 욕망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름’으로 분리되지 않은 세계를 찰나적으로 경험한 것일 수 있다. 그때 알았다. 우리는 둘이 아닌 세계를 이름으로 조각조각 나누어 살고 있음을. 둘 아닌 전체 생명의 장을 이름으로 분리한 후, 그 이름에 맞는 욕망의 세계에서 왜소하게 그리고 괴롭게 살고 있는 존재임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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