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민(감이당)

보살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고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을 앞서 보았다. 그러면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을 막는 장애가 뭘까?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마음에 생각()을 갖게 되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금강경정화 풀어씀. 법공양, 20

 

구제하려는 마음을 막는 생각이 상(相)을 갖는 것이고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에 집착한 상태라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상(相)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상(我相) - 절대적인 나, 변하지 않는 너

첫 번째로 아상이 있다. 몸과 마음에 변치 않는 순수한 나, 혹은 자아가 있다는 생각이다. 아(我)는 ‘나’, 상(相)은 어떤 바탕이나 본질을 뜻한다. 즉 ‘나’에 대한 프레임, 고정된 관념이 바로 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 살아계실 때 인도에는 카스트 제도로 네 가지 계급이 있었다. ‘이 계급에 따라 ‘절대적인 나’ ‘변하지 않는 너’의 특성을 브라만교에서 아트만이라고 불렀다.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실체인 아트만을 아상(我相)‘이라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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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도 곧잘 ‘나는 누구인가?’ 혹은 ‘진짜 나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다들 생전 가보지 못했던 곳, 평소 해보지 못했던 체험과 소비를 하며 독립된 자아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을 통해 진짜 나를 알게 되었죠.”, “부모님에게서 독립하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나를 발견했어요.”, “퇴사를 했더니 저의 원래 모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정말일까? 금강경을 읽었다면, 진짜 나, 새롭게 발견한 나, 되찾은 나 등 이 ‘나’들이 모두 아상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참된 나는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다. “‘나’라는 관념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나’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야 아상을 제대로 알게 되고, 아상을 알게 되었을 때 금강경이 알려주는 번뇌 벗어던지기의 힌트를 제대로 캐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의 모든 역사는 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 하나로 집결된다. 서양 철학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너 자신을 알라’고 소크라테스가 말했고, 그의 제자 플라톤이 세계와 이데아를 나누면서 분리된 자아가 있다는 관념을 주장했다. 즉, 서양 철학에서는 나, 즉 자아란 지속성과 동일성을 지니는 것이어야 한다. 그때그때의 사고 ·감정 ·의지 등 외부 변수는 이 순수한 자아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인간의 주체성이 확립되는 근세 이후, 자아에 대한 문제는 본격적으로 철학의 수면 위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 유명한 R.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에 의하여 ‘생각하는 나’를 정신이라 부르고, 이를 항상적 실체로서 확립한 것이다. 이 고정된 주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바로 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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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외부 변수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항상적인 주체가 정말 존재할까? 흔히 우리는‘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선 내 몸이 ‘나’이지 않은가? 그리고 내가 외부를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느끼는 감각들, 즉 정신이 ‘나’이지 않은가?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몸과 마음, 즉 오온(五蘊)이 합쳐진 것을 ‘나’라고 간주하고 있을 뿐이라고. 오온이란 다섯 가지 무더기,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다.

색(色)은 몸이고 수(受)는 느낌, 상(想)은 생각 또는 관념, 행(行)은 하고자 하는 의도, 식(識)은 의식을 말한다. 그러면 일단 색에 해당하는 몸부터 따져 보자. 내 몸의 60조개 세포는 끊임없이 죽고 교체되고 있다. 혈액은 3개월이 지나면 새로운 피로 모두 바뀌고 위 점막은 2주가 지나면 새로운 세포로 덮이며 뼈는 10년이면 모두 대체된다. 아기였을 때부터 특정한 이름을 지어 불러서 같은 사람으로 인식할 뿐, 뇌를 제외한 세포는 모두 바뀌어서 같은 것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이렇게 과학적으로 따져 봐도 몸은 계속 변화하고 있고 임시적으로 이루어진 이합집산이지 고정된 나라고 칭할만한 신체가 없다. 그러면 마음에 해당하는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어떤가? 수는 느낌인데 우리는 감각기관 눈 코 입 귀 혀를 통해 바깥과 접촉하고 느낌을 일으킨다. 보통 유쾌하거나 불쾌한 마음이다. 섭씨 4도씨 물은 여름에는 시원해서 좋지만 겨울에는 차가운 물이라 싫다. 느낌에 따라 좋고 싫어하는 감정이 휙휙 지나간다. 생각(想)도 마찬가지다. 옛날에 좋았지만 지금은 싫거나, 그 반대인 경우를 따져보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행(行)은 의도인데 배고프면 더 먹고 싶고 배부르면 먹기 싫은 것처럼 조건에 따라 이 또한 변한다. 식(識)은 이 모두를 아우르는 마음인데 계속 변하고 있는 느낌, 생각, 의도를 바탕으로 인식 판단하는 작용이다. 그래서 식(識)을 가장 강력한 마음 작용이라 부를 수 있지만 이 식(識)조차도 변하고 있어서 고정된 자아라고 근거할 것이 없다. 이렇게 샅샅이 뒤져봐도 나라고 부를만한 고정된 어떤 것도 찾을 수가 없다. 몸과 마음, 어디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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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아상(我相)이 확고한 사람은 외부와 분리되어 순수하게 존재하는 ‘나’에 대한 철썩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백 번 양보해서 피부를 경계로 바깥과 구분되어 안쪽에 있는 몸이 바로 고정된 ‘나’라고 치자. 그런데 나는 콧구멍을 통해 바깥공기를 호흡하면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내 코를 통해 내 폐로 들어온 공기는 나인가, 바깥인가? 더 나아가 우리는 음식을 섭취해 목숨을 유지할 수 있다. 눈앞에 있는 사과는 바깥이었는데 그 사과가 내 입을 통해 뱃속에 들어오면 그 사과는 나인가 아닌가? 그리고 음식을 먹어서 만들어진 똥을 내 것이라고 간주해서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다. 이렇든 생리적인 차원을 따져 봐도 순수한 ‘나’라는 실체는 성립되지 않는다.

존재로서의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가져서도 안 되고 비존재로서의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가져서도 안 된다.” 금강경정화 풀어씀. 법공양, 21

 

부처님은 우리에게 몸과 마음이 순수한 실체라는 생각을 가지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고 계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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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있는 사과는 바깥이었는데 그 사과가 내 입을 통해 뱃속에 들어오면 그 사과는 나인가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흔히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정된 나’로 존재한다고 여긴다. 고정된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 우리는 자신을 절대화하고 내가 원하는 이상을 설정한다. 그런데 현실은 내가 상상하는 것과 매우 다르고 이상과 갭이 아주 크다. 이런 경우 우리는 도달하지 못한 이상에 더욱더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도달할 목표를 자꾸 세우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여기게 된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목표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이 마음은 끝없이 확장한다. 그래서 내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괴롭다. 설령 잠시 목표에 도달한 상태가 되어도 이 성취감을 지속하기 위해서 더 높은 목표를 다시 설정한다. 그래서 경쟁자라 여긴 주위 사람을 질투하기도 하고 과하게 무리하여 자신의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또한 주위 사람이 ‘내가 원하는 이미지’로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인정 욕망 또한 자의식이고 아상이다. ‘상대가 나를 인정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타인을 원망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결국 스스로를 관계로부터 고립시킨다. 이런 태도는 번뇌의 원천이 된다.

‘절대적인 나’를 가지는 순간 ‘변하지 않는 너’가 설정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세상을 보면 우리가 연애하는 경우 상대가 변할 수도 있다는 인식의 작용 자체가 없다. 내가 변하는 것이 보이지 않으니 상대가 변하고 있는 것 또한 감지하지 못한다. 내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상대가 변한다는 상상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연애 처음에 짜릿했던 순간만이 영원히 지속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래서 둘 중 하나가 마음이 변하여 헤어지게 되면 ‘변하지 않아야 하는 너’가 변한 것을 이해하지 못해 데이트 폭력이 일어나기도 하고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 사랑했던 시절은 흘러가고 나와 너 모두가 변했지만 이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나를 고정하면서 상대를 고정하는 것이 망상이자 번뇌를 일으키는 마음이다.

이를 호르몬의 반응으로도 살펴볼 수 있다. 우리는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을 견고한 자아로 간주한다. 사실 감정은 어떤 환경에서 신경이 자극되면 호르몬이 분출되어 우리가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잘 알 수 있는 화가 난 상태를 살펴보자. 화가 날 때 작동하는 호르몬의 지속시간이 90초라서 생리적으로 90초가 지나면 화의 성질은 사라진다. 그러나 이때 ‘내가 누구 때문에 화가 났다.’하고 나와 화를 동일시하면 저 사람의 잘못을 끝없이 생각하게 되어 화는 90초가 지나 서서히 사라지려고 하는데 다시 화에 불을 붙인다. 이미 꺼지고 있는 모닥불에 기름을 퍼붓는 격인 것이다. 이 회로가 저장되면 저 사람을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화가 나는 반응이 나타난다. 화가 났던 상황은 사라졌는데 ‘화가 났던 그 순간의 내가 나야’하고 거기에 대한 집착이 생기면서 번뇌를 끊임없이 만들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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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상이란 사실 간단하다. 세계와 전혀 연결점이 없는 존재성을 ‘나’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불변의 ‘고정’과 외부와의 ‘분리’가 바로 아상의 핵심이다. 여기서 비롯된 자의식은 삶의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된다. 내가 옳다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기심과 더 멋진 나, 또는 모자란 나라는 헛된 망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숨 쉬고 밥 먹고 말하면서 느껴지는 외부와 나의 연결고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비대해진 자의식만 끌어안은 채로 끝없는 번뇌에 침잠해 들어갈 뿐이다. 당신이 가진 아상의 사이즈를 제대로 가늠해보고 싶다면, 일상을 잘 들여다보라. 회사에서 상사 때문에 화가 난다면, 아이 때문에 짜증이 난다면,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비대하고 뚱뚱한 아상이 작동하는 중이다. 『금강경』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부처님께 질문을 던지는 수보리도 출가하기 전 비대한 아상으로 괴로워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마음이란 참으로 대단한 것이라서 이 세상을 덮고도 남을 만큼 아상을 무한대로 확대할 수 있다. 아상의 또 다른 확장 버전들이 바로 인상(人相)과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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