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숙(감이당)

2,500년 전, 부처는 문명화될수록 더 큰 괴로움을 겪을 인간의 상황을 꿰뚫어 본 것일까? 그는 인간이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길을 찾아 나섰다. 부처가 찾은 길은 뭘까? 유식으로 보면, 종자가 현행하며 괴로움을 만들고 있으니 아뢰야식에 있는 종자를 모조리 없애는 것일까? 그러면 인간은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그런데 종자가 없다는 것은 우리네 삶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삶은 아뢰야식의 종자가 현행하며 그려진 것이니까. 그러니 초점은 종자를 없애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종자가 우리 삶에서 어떻게 괴로움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그 원리를 알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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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자들이 현행하는 법

아뢰야식에는 두 종류의 종자가 저장되어 있다. 명언종자와 업종자. ‘종자’라고 해서 정말 씨앗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습관적 행위로 인해 익숙해진 경향성 같은 것이다. 오랜 세월 비슷한 것을 반복하다 보니 우리 인격의 기저에 배이게 되는 기운 같은 것이다. 명언종자는 정신적 경향성이고, 업종자는 행위의 경향성이다. 정신적 경향성은 어떤 사물을 대했을 때 느낌이나 인상, 생각, 말(언어) 등으로 세상을 분별해서 아는 정신작용이고, 행위의 경향성은 그야말로 모든 행위를 의미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세 가지 종류의 업을 짓게 된다고 한다. 행위로 짓는 업(身業), 말로 짓는 업(口業), 생각으로 짓는 업(意業). 이 중 행위로 짓는 업은 업종자라 할 수 있고, 말과 생각으로 짓는 업은 명언종자라 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하는 활동 중 무엇이 업종자이고 무엇이 명언종자인지 딱 잘라 규정하기 어렵다. 말하는 것(口業)은 그 자체로 하나의 행위이기 때문에 업종자라고도 할 수 있고, 정신적 작용을 말이라는 수단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명언종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한 모든 행위나 정신적 습관이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종자는 아뢰야식에 저장된 후 현행하는 방식이 약간 다르다. 이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업종자는 특별히 ‘이숙습기(異熟習氣)’라 하고, 명언종자는 ‘등류습기(等流習氣)’라 한다. 습기는 습관적 기운이라는 뜻이다. 이숙습기는 “원인과 결과의 성질이 다른 습기를 말한다. 다시 말해 원인이 선악이면 결과도 선악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것과는 다르게 원인은 선악이지만 결과는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라는 것이다.” 반면, “등류습기에서 등류라는 것은 ‘원인(因)과 결과(果)가 닮다’라는 의미로, 원인과 결과의 성질이 동일함을 말한다.”(『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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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異熟)은 ‘다르게 익는다’는 의미이고, 등류(等流)는 ‘동일하게 흐른다’는 의미이다. 업종자는 훈습되는 종자(因)가 선이든 악이든 현행하는 것(果)은 무기(선도 악도 아님)로 나타나고, 명언종자는 훈습되는 것이 선이면 현행하는 것도 선이고, 훈습되는 것이 악(불선)이면 현행하는 것도 악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두 종류의 종자가 현행하는 모습에 차이가 있으니, 이를 잘 살펴보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다르게 익는(異熟) 업종자

업종자는 이숙습기이다. 이숙(異熟)이라는 것은 ‘다르게 익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다르게 익는다는 것일까? 먼저 행위 자체가 다르게 익는다는 것이다. 내가 이전에 행위 한 대로 현행되지 않고 다른 행위로 현행된다는 것. 예를 들어, 거리에 떠도는 노인이 추워보여서 옷을 줬는데 나중에 옷 자체가 아닌 다른 재물이나 생각지도 않은 일로 그 행위가 돌아온다는 것. 모든 업종자는 이렇게 원인으로 한 행위와 결과로 돌아오는 행위가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지금 내가 한 행위는 나만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수많은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 내가 의도를 가지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이 내가 의도한 대로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 일에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인연(사람, 일, 환경 등)들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한 행위(因)가 다음 순간 어떤 행위(果)를 불러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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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선악이 다르게 익는다는 것이다. 이는 앞 챕터에서 얘기한 바 있는 ‘인시선악 과시무기(因時善惡 果時無己)’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엔 선한 행위는 그대로 선한 결과를 낳고, 악한 행위는 그대로 악한 결과를 낳아야 하는데, 선한 행위든 악한 행위든 모두 선도 악도 아닌(無記) 행위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노인에게 한 선한 행위(옷을 줌)에 대해 다른 재물이 돌아오는 것을, 선한 행위인 원인에 대해 선한 행위인 결과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재물로 행위가 돌아오는 것이 선인지 악인지는 그 행위만으로는 알 수 없다. 즉 행위는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다음은 시간이 다르게 익는다는 것이다. 모든 행위가 그 즉시 결과를 발생시키지는 않는다는 것. 어떤 행위는 바로 다음 찰나에 결과가 생기지만 대부분의 많은 행위는 시간이 지난 후 결과가 돌아온다. 심지어 이번 생에 지은 업이 다음, 다다음 또는 다다다음생에 돌아오기도 한다는 것.

이에 의하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위들은 오래 전 또는 바로 전에 내가 했던 행위 그 자체와는 다르지만, 그 행위를 원인으로 한 결과이며, 이 행위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업종자는 이렇게 현행하며, 저장되고, 다시 현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괴로움(번뇌)을 만드는 것은 업종자가 아니다. 행위는 무수히 바뀌는 인연조건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른 행위를 낳고 또 낳는다. 어떤 행위든 아뢰야식에서 현행할 때는 선도 악도 아니기 때문에 행위는 그 자체로는 번뇌를 품고 있지 않다.

비슷하게 흐르는(等流) 명언종자

어떤 행위가 괴로움이 되는 것은 그 행위에 애착이 붙을 때이다. 애착은 마음의 작용(心所)이다. 좋고 싫다는 마음, 더 나아가 갈망과 혐오하는 마음. 행위 자체보다 행위에 갈망하고 혐오하는 마음이 붙을 때 우리는 괴로운 것이다. 바로 여기에 명언종자가 개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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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종자는 등류습기이다. “등(等)은 상사(相似)의 뜻으로 인(因, 種子)을 가리키고, 류(流)는 류류(流類)의 뜻으로 과(果)를 가리킨다.”(『유식삼십송 풀이』 p127) 명언종자는 원인과 비슷하게 닮은 결과를 내는 습기라는 것. 선한 원인에는 선한 결과로 나타나고, 악(불선)한 원인에는 악한 결과로 나타나며, 무기의 원인에는 무기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선’이 무엇인지가 헷갈린다. 선은 ‘착하다’는 의미인데, 착하다는 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유식삼십송 풀이』(후카무라 세이분 저)에서는 선은 “2세(世)에 걸쳐서 자타를 순익(順益)하는 것”이고, 악은 “2세에 걸쳐서 자타를 위손(違損)하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2세란 과거와 현재 또는 현재와 미래와 같이” 두 세상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선이란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이익을 주는 마음이나 행위’이다. 정화스님은 선을 “우리 삶을 공, 무상, 무아 속으로 흘러가게 만드는 마음작용”(『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p154 참조)이라고 한다. 우리 삶을 공, 무상, 무아로 흘러가게 만드는 마음작용은 분별하지 않는 마음이다. 공, 무상, 무아는 나니, 너니, 나의 것이니, 너의 것이니 하는 분별하는 마음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명언은 분별하는 마음이다. 정신적 작용은 ‘무엇이다’는 분별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은가. 특히 언어를 쓴다는 것,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분별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분별하지 않는 것이 ‘선’이라니. 이 말은 애초 명언은 불선(악)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래 맞다. 이 선악의 기준에 따르면, 모든 명언은 불선이다. 명언은 두루 분별한(遍計) 것(所)에 대해 집착(執)하는 마음이 형성한 것이고,(‘욕망의 세계, 이름은 욕망이다’ 참조) 이렇게 생긴 명언은 불선에서(因) 불선으로(果) 세세생생 이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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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언어를 쓴다는 것,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분별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업종자는 번뇌를 품고 있지 않고, 명언종자는 태생적으로 번뇌를 품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명언을 쓰는 한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행위를 하든, 정신 작용이 있는 한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곳에 갇힌 기분. 여기서 어떻게 문(門)을 찾을 것인가?

병이 난 곳에 약도 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란 말이 있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는 말인데, 자신이 사는 땅에서 나는 것을 먹어야 체질에 잘 맞다는 말이다. 이는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쓰는 말이기도 하지만, 병이 났을 때 약을 찾는 방법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내 몸의 병을 고치기 위한 약은 병이 난 바로 그 땅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괴로움에 살게 하는 것이 명언이라면, 우리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도 명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니 앞으로 연재되는 글에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명언의 사용법(?)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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