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민(감이당)

4) 수자상(壽者相) - 젊음과 몸에 대한 집착

수자상(壽者相)의 수는 목숨 수(壽)이다. 존재하는 것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수자상이다. 이는 아프기 싫고, 늙고 싶지 않으며, 죽기 싫다는 마음 상태이다.

나이 들어 생기는 몸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문제는 젊음과 건강 자체에 대한 집착으로 스스로 내 몸을 젊게 유지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리는 경우이다. 이 마음은 내 몸은 내가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해 운동, 등산 등에 지나치게 몰두하게 한다. 이런 환자들에게 의사인 내가 “환자분의 증상은 노화로 인해 생긴 질병 때문입니다.”라고 하면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괴로워한다. 가끔 이 진단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환자가 진료실에서 버럭 화를 내면서 고함을 지르는 경우도 있다. 이 마음의 근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는 영원히 건강하고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명제(壽者相)’ 가 깔려있었다. 그래서 점점 노쇠(老衰) 하는 몸의 상태를 직시하기보다는 이 사실을 듣고 화를 내는 것이었다. 어떤 시절 인연이 와도 그것과 관계없이 나는 내 몸을 조절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아상(我相)이고 이렇게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집이 수자상(壽者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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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발달한 현대는 젊음과 건강이 영원할 수 있다고 부추긴다. 태반주사나 줄기세포 치료가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젊음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노년에 대한 성찰 없이 늙는 것을 회피하려고 고가의 미용 주사를 맞는다. 나이가 들어 생기는 조금의 주름살도 못 견뎌 하고 한 술 더 떠 다가올 죽음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마음이 냉동 인간까지 개발하게 했다. 냉동인간은 임종을 맞은 직후에 몸을 얼리는 방식이다.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은 뇌와 신체기능이 한동안 유지되는데 이 골든타임에 몸이나 뇌를 얼리면 먼 미래에 해동시켜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67년 73세로 암으로 숨진 제임스 베드포드 캘리포니아대 심리학과 교수가 세계에서 첫 냉동인간이 되기를 선택했고 그 후로 53년이 흘렀다. 그의 시신은 미국 애리조나의 생명 연장 재단에 보관되었다. 이렇게 수자상에 얽매인 사람들은 ‘나의 몸’을 영원히 보존하고 싶어 하고 그 결과 과학발전을 이용하여 기괴한 일을 벌이고 있다.

일상에서 흔히 보는 지하철 광고에 등장하는 동안(童顔) 광고, 몸에 좋다고 선전하는 영양제 광고 등도 우리의 수자상을 더욱 견고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병원에 가면 죽지 않고, 성형수술이나 화장품 등으로 젊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생각의 회로가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이나 질환에 걸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 “젊고 건강한 내(壽者相)”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니, 늙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현재의 불편함을 괴로움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지나간 것을 놓지 못하니, 앞으로 다가올 죽음은 더욱더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게 된다. 젊음에 대한 집착은 나이 듦에 대해서 억울함과 불안감을 낳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몸에 좋다는 온갖 건강식품을 마구 먹는다. 영양제 과다 섭취 부작용을 설명하는데 진료 시간의 대부분을 쓸 정도다. 의료 기술이 최첨단으로 발달하고 건강보험이 제도화되었지만 이런 불안의 역습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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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에 나오는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은 “무릇 모든 상(相)은 다 허망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모든 상’이란 우리가 경계 짓는 상들을 말하며 젊음과 건강, 물건, 고정관념, 가치관 등을 의미한다. 이것이 허망하다는 말은 거짓되고 망령된 것이라는 뜻이다. 즉 어떤 상을 경계 지어 고정된 것으로 보는 것은 거짓이며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둘러싼 상들이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유동하는 흐름 속에 있음을 알고, 그 경계를 더 이상 붙들지 않는 것, 이것이 곧 보살의 삶을 사는 것이며 동시에 수자상을 깨는 것이다.

5) 상(相)이 없다는 상(相)에도 머물지 마라

보살은 이렇게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분별이 일어난 순간에 자신의 감정과 호오, 선악을 얹는 것은 상을 만드는 것이라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매 순간 분별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분별이 일어난 순간조차도 없애야 한다고 조바심을 내게 되면 우리는 상(相)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살아가면서 늘 마주치는 감정을 대하면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을 없애야 하는데!”하는 무아병(無我病)에 걸린 상태가 된다. 스승들은 이 경우 치료가 더 어렵다고 흔히들 말한다. 왜냐하면 무아(無我)라는 것이 실체화되어 ‘무아(無我)라는 상’을 또 형성하게 되니까 곤란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처님은 상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상(相)에도 머물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비법상(非法相)을 갖게 되더라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금강경정화 풀어씀, 법공양, 20

 

비법상(非法相)은 상이 없다는 명제를 다시 실체화한 마음이다. 이 모든 상을 타파하여 보살이 됐다는 설정도 새로운 상을 만든 것이라는 말이다. 결국 ‘상이 없다는 상(非法相)’ 자체도 분별하는 마음이라서 우리가 지어낸 망상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즉 무엇인가 ‘있다’ ‘없다’라는 것은 대상이 실제 함을 전제로 해야 하는 말이다. 있다는 생각을 없다는 생각으로 무화(無化) 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없음의 생각조차도 해체해야 한다. 상에 걸려서 분별을 일으키면 괴롭다는 것을 알고 상에 걸리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이 없음에 자아 정체성을 투여하면 다시 비법상(非法相)을 만드는 것이라 이 조차도 넘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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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있다 해도 맞지 않지만 없다고 해도 옳지 않다. 사실 상이 ‘있다, 없다’를 일으키는 분별 자체가 괴로움인 줄 아는 것이 바로 해결책이다. 내가 상(相)에 사로잡혀 괴롭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깨닫는 것이다. 이를 깨닫는 것은 집착할 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번뇌가 더 이상 나를 괴롭힐 수 없다. 번뇌를 번뇌인 줄 아는 것이 깨달음이지 번뇌를 떠나서 깨달음이라는 실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분별을 알아차리는 흐름만 있을 뿐이다.

세상은 원인과 결과라는 연기(緣起) 조건에 의해서 존재한다. 어떤 것이 원인으로 해서 결과가 나타난 것이지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일체가 분리될 수 없고 이 세상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을 뚜렷이 안다는 뜻이다. 식물, 동물, 생물, 무생물까지 모두 연관되어 있다. 이름을 만들어서 구별할 뿐이지 존재 자체는 금을 그을 수 없다. 일체의 세계는 다만 그렇게 존재하며, 그저 생긴 대로 다 완전한 것이다. 여러 가지 갈등과 괴로움은 우리가 분별을 일으켜 하나하나의 생명을 별개로 보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 내가 화가 났을 때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감정이 일어났는지 탐구하여 그 상황을 명징하게 볼 수 있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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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일체가 분리될 수 없고 이 세상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을 뚜렷이 안다는 뜻이다. 식물, 동물, 생물, 무생물까지 모두 연관되어 있다.

이렇게 분별하는 상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이 생긴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지위 고하 남녀노소로 차별하지 않는 마음이 일어나고 물건도 함부로 버리거나 대하지 않게 된다. 이런 마음이 자비와 공감이다. 더불어 삶의 큰 기쁨으로 다가온 이 지혜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고 싶어진다. 이것이 모든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겠다는 보살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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