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진(감이당)

이야기로 세상을 구하다

‘옛날에 큰 재산을 가진 상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천일일의 첫 날 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옛날에’라는 말만 들어도 귀가 쫑긋해지지 않는가? 이야기를 이어가는 화자는 세헤라자드, 청자는 날이 새는 즉시 그녀를 죽일 계획인 왕과 이 침실에 함께하게 된 그녀의 동생 디나르자드, 이렇게 두 명이다. 이때부터 그녀가 앞으로 쉬지 않고 이어가게 될 이야기 속에서 아랍인들의 삶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이 작품은 오리엔탈 세계의 창이 되었다.

앞으로 세헤라자드의 입을 통해 펼쳐질 사랑과 모험, 종교와 돈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우리를 매혹시키는 훌륭한 주제들이다. 하지만, 천일야화의 가장 고유한 지점은 이 이야기가 매일 밤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는 점이다. 즉 각종 에피소드가 담긴 프레임이 아주 독특하다는 것. 세헤라자드가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하다가 결국 1001일의 밤이 지난 후 처형의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것이 『천일야화』의 중심 골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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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인을 처형하려는 걸까? 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페르시아의 한 왕국의 왕인 샤리아 왕과 그 동생 샤즈난 왕은 둘 다 부인들로부터 배신을 당했다. 두 왕은 자신들이 궁을 비운 사이에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 성적인 탐닉을 즐기는 왕비들을 발견하고는 죽여 버렸다. 형인 샤리아 왕은 그걸로 분이 풀리지 않아 매일 밤 침실에 처녀들을 새로 들이고 날이 밝으면 처형해버렸다. 이런 방식으로 불특정 다수의 여인들에게 복수하는 왕을 아무도 못 말리고 온 나라가 슬픔에 신음하던 중에 재상의 딸 세헤라자드가 왕의 침실에 들겠다고 자처하고 나섰던 것이다.

제게는 지금 술탄님께서 이 도성의 각 가정에 범하고 계신 그 야만스러운 행위를 중단시키려는 뜻이 있습니다. 저는 딸을 잃게 될까 봐 떨고 있는 이 도성 어머니들의 두려움을 없애 주고 싶답니다.”(앙투안 갈랑, 『천일야화』 1권, 열린 책들, 33쪽)

재상의 딸이라 목전의 위험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세헤라자드는 비탄에 잠긴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들을 구하려 위험 가운데로 뛰어든다. 하지만 도대체 관용이라곤 없는 이 무서운 왕의 폭정을 무슨 배짱으로 막겠다는 것인가? 그건 바로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이야기 부스러기들이었다.

목숨을 내놓고 전장에 나가는 용감한 전사는 자신의 무기와 용맹함을 믿고 있을 것이다. 전쟁 중에 싸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전사는 휘둘러볼 창과 방패가 있기에 전장에 나간다. 세헤라자드의 무기는 이야기다. 그녀의 이야기는 죽이지 말아달라는 간청도 아니고 왕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훌륭한 영적 지도자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믿는 것은 그저 자질구레한 옛날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아마도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이야기에 귀가 쫑긋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주의를 집중시키는 이야기의 힘을 말이다. 그렇게 한 번 이야기에 빠져들고 나면, 그 끝을 알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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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이야기에 귀가 쫑긋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주의를 집중시키는 이야기의 힘을 말이다.

그래서 세헤라자드는 날이 밝아올 무렵 클라이막스에서 이야기를 마친다. 지금도 모든 드라마는 이 본을 따르고 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뒷이야기를 아주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이야기를 뚝 그친다. 동생 디나르자드가 안타까워하면 그 뒤의 이야기는 훨씬 더 재미있단다. 들어보면 내 말이 옳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만일 술탄께서 오늘 하루만 더 살게 해주셔서, 내일 밤 나머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말이야”(같은 책, 53쬭) 라며 하루를 더 살게 해줄지 말지를 전적으로 왕의 결정에 맡기고 순종하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이야기의 첫 번째 무기인 ‘호기심’을 왕에게 휘둘러 놓고서 기다리는 중이다. 매일 아침 동 틀 무렵, 왕은 매번 이 무기에 지고 만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힘

이야기에는 호기심보다 더 큰 힘이 있다. 단지 호기심 때문에 그녀를 살려두었다면 한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왕은 동틀 무렵 어떤 이야기가 완전히 끝났을 때도 그녀를 살려두고 다음 날 새로운 이야기를 듣기를 고대하며 정무를 보러 나간다. 이미 그의 마음은 부드러워지고, 그의 원한의 매듭이 풀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또 다른 마력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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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두 번째 힘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상대를 가장 잘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너 이런 얘기 못 들어봤어?’ 이러면서 예시를 드는 것이며,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방법도 옛 이야기를 통해 우회적으로 교훈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 이야기를 통해 알게 모르게 교훈을 얻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를 생각한다. 백신 부작용을 겪은 사람 뉴스를 듣고 백신이 위험하다고도 생각하여 안 맞기도 하고, 그게 과장된 뉴스라는 얘기를 듣고서 마음을 돌리기도 한다. 또 보이스피싱 당한 사람의 이야기, 배우자가 바람 핀 사람의 이야기 등등을 떠들면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학습한다.

『천일야화』에서 이야기를 통해 마음을 바꾸게 되는 가장 대표적 사례는 아마도 샤리아 왕일 것이다. 그러나 세헤라자드의 무기는 은밀히 감춰져 있어서 표면적으로 왕을 설득하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천일야화에는 노골적으로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사례를 끌어오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우선, 세헤라자드가 아버지 재상에게 자기를 왕에게 보내달라고 간청했을 때다. 재상은 당연히 펄펄 뛰며 반대한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해도 딸이 고집을 부리자 우화를 끌어와서 딸을 설득하려고 한다.

도대체 왜 제 발로 불구덩이에 뛰어들려 하는 거냐? 위험한 일의 결말을 예측하지 못하는 자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없는 법이다. 나는 어떤 당나귀의 운명이 네게도 똑같이 닥치지 않을까 걱정이다. 행복한 처지에 있었건만, 제자리를 지키지 못했던 어리석은 당나귀 말이다.” (같은 책, 34쪽)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논쟁 중에 이렇게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우화라니…! 당연히 세헤라자드는 ‘그 당나귀한테 어떤 불행이 일어났던 거죠?’라고 물었고 재상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우화는 힘들어하는 황소를 동정하면서 꾀부리는 법을 알려준 당나귀가 있었는데, 이 집주인이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 능력이 있어서 그걸 엿듣고는 당나귀에게 황소의 일을 옴팡 뒤집어 쓰게 했다는 이야기다. 재상의 주장은 딸의 편한 처지를 천만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누군가를 도와주겠다는 마음이 자신의 불행이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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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헤라자드가 이 이야기를 듣고도 의지를 꺾지 않자, 재상은 그녀를 때려서라도 집에 가두어 놓고 싶었나보다. 그는 이 우화의 뒷이야기를 해준다. 황소의 일을 감당할 수 없던 당나귀가 다시 사태를 원상복귀 시키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을 이 주인이 또 엿듣고서 웃음을 터뜨렸더니, 부인이 그 이유가 알고 싶어서 얘기해달라고 떼를 쓴다. 그런데 주인은 이 능력을 누설하면 죽게 되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며 아내를 달래보지만 그녀는 안하무인으로 단식투쟁까지 한다. 이 주인은 결국 암탉을 다루는 수탉의 비법을 엿듣고는 자기도 아내를 방에 가둬놓고 매를 흠씬 때려서 고집을 꺾게 만든 이야기다. 이 얘기에 담긴 재상의 마음은 ‘목숨이 달린 일에 고집을 부리다니, 너도 맞아 볼테냐?’였다. 이렇게 재치 만점의 아버지라니, 부전자전! 세헤라자드의 이야기 보따리는 분명 아버지에게서 받은 능력일 것이다.

목숨을 구하는 스토리텔링

천일야화의 가장 큰 매력은 ‘이야기’의 역할과 그것이 뿜어내는 힘 자체다. 천일야화 속에서 ‘이야기’는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도구로 쓰인다. 한 상인이 대추야자 씨앗을 아무데나 뱉었다가 그 씨앗에 맞아 죽은 어떤 존재(?)의 부모를 자처하는 정령에게 목숨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그 상인이 1년의 말미를 얻었다가, 1년 후 그 자리에 죽으러 돌아왔을 때 그곳을 지나던 세 명의 노인이 있었다. 정령이 나타났을 때, 동정심을 느낀 그 노인들은 자기들이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재미있으면 그 상인을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재미가 조금만 있었던 탓에 1/3씩 경감되어 결국 세 노인의 이야기가 준 재미를 합산하여 상인의 목숨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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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바그다드의 세 아가씨들의 야회에 우연히 나그네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참여의 조건은 ‘아무것도 묻지 말 것’이었으나, 우연히 상인차림으로 변장하고 그 자리에 끼게 된 칼리프(압바스 왕조의 가장 높은 직위. 이슬람제국의 정치와 종교적 최고지도자)가 궁금증을 못 참고 물어보는 바람에 그녀들의 분노를 사고,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이 때, 나그네들이 사정사정하며 살려달라고 하자, 그녀들이 살려주는 조건으로 내건 것도 모두가 이야기를 한 자락씩 하는 것이었다.

이들을 풀어 주어라! 하지만 너희들은 여기 남아 있도록 해라! 그리고 이들 중, 자신의 이야기와 이 집에까지 오게 된 사연을 들려주는 자에게는 손을 대지 말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해주어라! 하지만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 자는 결코 용서하지 마라!” (같은 책, 189)

그냥 앞에 나가서 이야기 하는 것도 떨리는 마당에 자기의 목숨을 걸고 하는 이야기는 목소리조차 안 나올 것만 같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들은 자신들의 기구한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하나같이 놀랍도록 불행한 일을 겪은 왕자들의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진다. 바그다드의 세 아가씨들은 모든 이야기를 듣고 이들을 풀어주었다.

목숨을 맡겨놓고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 자, 그것은 바로 세헤라자드 자신이다. 세헤라자드의 이야기에는 굉장한 모험을 겪은 사람들의 얘기뿐 아니라, 느닷없이 불행을 당하는 많은 왕자들의 얘기들도 나온다. 사랑에 목매는 자들과 나라를 잃고 떠도는 사람들,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여인들, 왕의 폭정에 시달리는 많은 백성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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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하루하루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 샤리아 왕은 자신의 불행이 이 많은 불행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 자신의 삶도 그네들의 삶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껴가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어떻게 타인의 삶을 접하고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을까? 모두 이야기를 통해서이다. 우리는 말, 즉 스토리텔링으로 천 냥 빚만 갚는 것이 아니라, 목숨도 구할 수 있으며, 상대를 지혜롭게 해서 세상을 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연마해야 하는 것은 슈퍼맨같은 근육이 아니라, 『천일야화』의 무기인 스토리텔링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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