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연(살림당)

2021년 남산강학원에는 <암송의 주역>이라는 1년 과정의 주역 프로그램이 생겼다. 이 프로그램은 “오늘 배운 주역 2괘, 오늘 외워버리겠어!”라는 어마어마한 포부를 내세운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을 신청하면서 나는 나이롱 학생으로 주역을 공부했던 과거(작년)를 청산하고, 올해는 성실히 외워보자는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했다.

모여서 외우기?

우리의 공부는 정말 “암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수업 시작 전에 30분 동안 지난주에 배운(=외워온) 것을 시험을 보고, 오늘의 공부를 시작했다. 한 시간 반 정도 수업을 들은 뒤에는 조별로 모여 앉아, 오늘 배운 2괘의 한글 뜻을 외우고 돌아갔다. 뜻을 외우고 가고, 한자를 외워와서 시험을 보는 시스템! 주역 그 자체를 우리의 몸에 받아들이는 것, 이것에 더 중점을 두고 기획하신 듯하다.

작년에 했던 주역 프로그램과 특히 달랐던 것은 수업 후 ‘조별 토론’이 아닌 ‘조별 암기’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 배운 것은 오늘 외우고 돌아간다’는 어마어마한 계획 아래 생겨난 방식이였다. 수업이 끝나는 순간 책을 덮고, 외워야 하는 그 마지막 절체절명의 시간이 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주역』을 펼치지 않는 나의 게으름을 알았기에. 배운 후에 바로 복습하는 것이, 게으른 나에게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문스러웠던 지점은 ‘조별’이라는 방식이었다. ‘각자 외우는데 모여서 외우는 것이 어떤 의미지?’, ‘암기하는데, 꼭 모여서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은 익숙한데, 이 방식은 새로운 포맷이라 상상되지 않았다. 프로그램 시작 당일 ‘조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왜 모여서 외워야 하는지에 대해 튜터 선생님들께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조 선생님들과 둘러앉아 외워야 했기 때문이다.

튜터 선생님께서는 한자 뜻을 해석하다가 안 되는 지점을 서로 묻거나, 외우면서 모르는 게 생기면 같이 나누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기본적으로 뜻을 익히고 돌아가는 시간으로 삼으면 된다고 말이다. 듣고 보니, 아무리 혼자 외우는 거라고 하더라도, 같이 리듬을 맞춰서 그 기운 장에서 공부하는 것과 따로따로 하는 것은 확실히 다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둘러앉아 각자 외우고, 뜻 시험을 보기도 하고, 시작할 때 봤던 한자 시험을 체크하기도 하면서 ‘조별 암기 활동’을 진행해왔다. 그런데! 여느 때처럼 진행하려 했던 2학기 초반, 우리 조 선생님 한 분이 문제를 제기해오셨다. “외우는 건 집에 가서 하면 되는데, 모여서 이걸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 시간이 너무 괴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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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이면의 마음 읽기

처음엔 좀 당혹스러웠다. 이미 한 학기가 지난 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처음에 그랬으니 말이다.

우선, 올해 주역이 “암기”에 초점이 맞춰진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말씀드렸다. 잊기 전에 복습하고 집에 가서 외우면 뜻과 한자가 더 잘 기억되실 거라고. 뜻을 외우는 시간으로 삼아보시라고 말이다.

어떤 점이 걸리시는지 여쭤보니, 이 시간이 버리는 시간 같다고 하셨다. 예습을 해와서 이야기를 하든, 배운 걸 이야기를 하든 모여서 할 수 있는 걸 하거나, 아예 다른 방식으로 해보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주역이 아직 몸에 장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쉽게 주역 없는 ‘수다’가 되어버린다고 설득해보았지만, 말이 잘 들어가지는 않는 듯했다. 원칙적으로 말씀을 드리고, 튜터 선생님들과 한 번 상의해보겠다고 하고, 일단 마무리를 했다.

사건이 지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주역을 메인 프로그램으로 공부하시고, 일주일에 한 번 오시는 선생님들은 정말 아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몇 마디 못 나누고 돌아가시고, 코로나 상황이라 주방에서 밥도 함께 못 먹으니 아쉬울 만도 하셨다.

처음 문제를 제기하셨을 때는, 학기 초반 내가 겪었던 ‘조별 암기’에 대한 당혹스러움을 생각하니 그럴 수도 있으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내가 납득되었던 이유, 프로그램의 취지 등을 말씀드리면, 마음이 풀리실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선생님은 계속해서 ‘다른’ 것들을 이야기하셨다.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을 읽고 싶다고 이야기하시기도 하고, 강의 때 들은 것을 서로 나눠보자고 하시고, 예습을 해와서 나눠보자고도 하셨다. 지금 하는 ‘암기’가 아니면 무엇이든 좋다, 라는 느낌이었다. ‘이런…, 어떡하란 말인가?’

지나고 나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여러 다른 대안들을 찬찬히 생각해보니, 공통점이 있었다.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던 거였다. ‘말’ 이면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했었다. 공부한 것을 이야기를 하며, 나누고 싶으셨던 그 마음을 말이다. 하지만 이 마음을 알았다고, 프로그램의 포맷을 수정하는 건 다른 문제다. 프로그램의 의도와 공부중심이 있고, 무엇보다 수많은 인원이 함께 호흡을 맞춰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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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한 것을 이야기를 하며, 나누고 싶으셨던 그 마음을 말이다.

‘스타트 라인’ 셋팅하기

이 사건으로 튜터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된 것이 있었다. 프로그램 기획 의도의 핵심은 “복습”이라는 것! 복습을 하는 하나의 형식이 암기였던 거다. 그렇기에 프로그램이 중심으로 삼고 있는 “복습”이라는 ‘내용’ 위에서라면, ‘형식’은 충분히 논의될 수 있다. 우리에게 공부가 더 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형식에 변화를 주더라도 이 중심 위에서 고려되어야 하고, 리듬 위에서 새로운 형식을 고려해야 한다. 또 하나 더, 새로운 형식을 고민해보더라도, 학기 등 하나의 리듬을 마무리하고 시작하는 게 좋다고 덧붙여주셨다.

『대학』에 “만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마침과 시작이 있다”(物有本末 事有終始)는 말이 있다. 사건 속에서 적용해보면 참으로 유용한 말인데, 이렇게 매번 놓치게 되는 것 같다. 모든 것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다. 근본은 곧 ‘중심’이다. 주역 프로그램의 중심이 ‘복습’이었다면, 그 위에서 다른 것들은 변주할 수 있다. 이럴 때, 단단하면서도 유동적으로 우리 삶을 운용할 수 있게 된다. 이 중심을 두고, 변주를 하려고 할 때도 윤리가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의 리듬을 가지고 일을 마치는 것, 그리고 중심 위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이 과정으로 볼 때, 첫 시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작이 반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 ‘첫 스타트’를 근본적인 중심 위에서 시작해야 한다. 함께 무언가를 도모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문제를 제기하셨던 선생님을 대할 때 ‘원칙적’으로 되었던 것은, 근본이 제대로 서지 않아서이다. 나의 ‘첫 스타트’가 모호했기 때문이다. ‘조별 암기’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고, 그 의구심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시작했기에, 함께 하는 선생님들도 이 중심을 잡고 갈 수 없었던 거다. 어느 정도 이해되었었고, 하다 보면 알겠지, 이런 마음으로 시작했던 것이 문제였다. 사건을 마무리하는 힘도 중요하지만, 그 첫 시작 셋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첫 마음’을 맞추고 같이 출발하는 것! 함께 공부하는 리듬을 만드는 데에 꼭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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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마음’을 맞추고 같이 출발하는 것! 함께 공부하는 리듬을 만드는 데에 꼭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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