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숙(감이당)

번뇌는 정신활동의 부작용?

얼마 전에, 법륜스님의 『반야심경 이야기』를 읽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를 물질현상과 생명현상 그리고 정신현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 모든 현상의 공통원리는 ‘연기(緣起)’라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서이다. 물질도 생명도 정신도 주변과 수많은 연관관계를 맺으며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평소 많이 들었던 내용이라 별생각 없이 읽다가 놀라운 점을 알게 되었다. 물질현상이 복잡해지면, 즉 물질들끼리의 연관이 복잡해지면 어느 순간 거기서 생명현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물질의 상호 의존적인 연관이 복잡해지면 물질들 사이에 질적 변화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생명현상이라는 것. 생각해보면 생명현상은 늘 신비로웠다. 생명체는 분명 물질로 구성되어 있지만, 일반적인 물질의 작용 원리와는 다르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예로, 물질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지만 생명은 아래에서 위로 오를 수 있다. 물살을 거슬러 자기 고향을 찾아가는 연어를 생각해보라. 일반 물리 법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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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생명현상이 다시 복잡해지면, 즉 생명끼리의 연관이 복잡해지면, 생명들 사이의 관계에 질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것이 정신현상이라는 것이다. 단세포 생명에서 다세포 생명으로의 진화는 생명끼리의 연관이 복잡다단해지는 과정이다. 생명들끼리의 연관이 복잡해진 소위 고등생명엔 단순한 생명체들에선 볼 수 없는 정신현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동물들이 여기에 속한다. ‘뇌(brain)’라는 것은 고등생명들이 정신현상을 일으키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식물도 다세포 생명이므로 식물 나름의 정신현상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지구상의 다른 어떤 생명보다 복잡한 정신활동을 한다. 인간의 복잡한 정신활동은 무리를 지어 살며 사회라는 것을 형성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정신활동의 중심에 언어가 있다. 언어는 상징이다. 상징은 직접 보지 못한 듣지 못한 체험하지 못한 수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상상한 것을 언어로 전달하는 인간의 능력은 그 상상한 것을 현실로 만들어 내기 시작했고, 급기야 자신이 사는 환경의 제약에서 벗어났다. 아니 벗어났을 뿐 아니라 자기가 사는 환경을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상황에까지 왔다.

생명현상은 물질 법칙을 벗어나는 독특한 경험(예컨대 연어 같은)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삶과 죽음(그사이에 늙음과 병듬)이라는 부작용(^^;)을 만들었다. 물질에 삶이 어디 있고 죽음이 어디 있는가. 삶과 죽음은 생명의 독특한 현상이다. 우리 인간은 생명이기 때문에 생로병사를 겪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신현상은 생명체가 갖는 환경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지만 동시에 여러 정신적 번뇌(八苦)를 만드는 부작용을 만들었다. 번뇌는 인간만이 갖는 독특한 현상이다. 동물은 육체적 괴로움, 공포 등은 있지만 인간과 같은 정신적 번뇌는 없다. 그러니 인간이 번뇌를 갖는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생명들보다 훨씬 더 정신현상이 발달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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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진화가 어떤 특정한 방향을 가지고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진화과정에서 형성된 하나의 방향을 추정하자면, 끊임없이 주변과 연관관계를 맺으며 복잡다단한 관계망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 복잡다단한 관계망이 물질현상에서 생명현상, 생명현상에서 정신현상으로 나타난다. 그 끝에 인간이 있다. 그러니 궁금하지 않은가? 정신현상이 복잡해지면 그 다음엔 어떤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지?

집중의 상태에서 관찰을 일으켜 깨달은 것

집중의 상태(사마타, 止)에서 능히 관찰을 일으켜(위빠사나, 觀) 세상의 실상을 꿰뚫어 이해할 때(앞 연재 참조) 우리는 무엇을 알게 될까? 그리고 이 과정 자체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집중이라는 것은 마음이 ‘말(명언)’에 끌려 다니지 않는 상태이다. 배가 항구에 정박할 때 닻을 땅에 내리는 것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움직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한다는 것은 배가 닻을 땅에 내리는 것과 같다. 마음이 생각에 꺼둘리며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도록 한 후 그 상태에서 관찰을 일으킨다는 것. 그때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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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대상에 집중한다는 것은 배가 닻을 땅에 내리는 것과 같다. 마음이 생각에 꺼둘리며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도록 한 후 그 상태에서 관찰을 일으킨다는 것.

앞선 연재(‘괴로움, 그것을 안다는 것’ 참조)에서 명상센터에 다녀온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 명상센터에서는 호흡에 집중하는 명상(사마타, 止)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즉 집중 상태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으면, 전신(全身)의 감각을 스캔하듯 관찰(지켜보기)하는 명상(위빠사나, 觀)을 했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몸의 감각을 차례대로 ‘집중을 유지하며’ ‘지켜보는 것’이다. 몸의 감각을 지켜보다 보면 몸에는 수많은 감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감각은 익숙하고 어떤 감각은 낯설었다. 하루 종일 단조롭게 감각을 지켜보면 지루할 것이라 생각되지만 사실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몸은 수많은 감각으로 득시글거리고 있었고, 단 한순간도 같은 감각은 없었다. 그렇게 관찰을 계속하다 보면, 몸의 감각은 참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된다. 그런데 그 무상한 와중에 좋은 감각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하고 안 좋은 감각은 밀어내고자 하는 마음작용(집착)이 일어남을 본다. 그리고 그 마음이 괴로움(苦)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좋은 감각은 유지할 수 있고 좋지 않은 감각은 없앨 수 있는 ‘나’라는 것이 없다(無我)는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된다. 평소 너무나 선명히 ‘있다(有)’고 생각한 ‘나’는 순간순간 변하는 느낌, 생각, 감정, 인식들을 조합하여 임시로 이름붙인 것뿐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집중의 상태(止)에서 움직이는 몸의 감각을 관찰(觀)하면서 무상, 고, 무아(三法印)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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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극도로 청명하게 한 상태에서 사유를 밀어붙여 보게 되는 세상의 실상(實相)은 무엇일까? 집중의 상태(止)에서 세상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았을(觀) 때 깨닫게 되는 것. 불교에서는 그렇게 깨달은 것이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한다. 연기법은 세상 모든 것은 상호 의존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을 뿐 그 자체로 자성을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생성되고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소멸될 뿐이라는 것. 연기(緣起)가 세상의 실상, 즉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라는 것. 모든 것은 연기하므로 매순간 변한다(諸行無常). 그런데 이 변화 속에서 ‘나’, ‘내 것’ 또는 ‘그것’을 잡으려니(愛, 取) 괴롭다(一切皆苦). ‘나’, ‘내 것’ 또는 ‘그것’이라고 잡은 그 속엔 그 자체로 자성을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諸法無我). 집중의 상태에서 본 세상의 실상은 의외로 간단하다. 하지만 집중하지 않고, 그리고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을 땐 절대 보이지 않는 실상이다.

마음의 의지처(依)를 바꿔라(轉)

인간의 정신활동에서 비롯된 괴로움은 무엇이 ‘있다’ 또는 ‘없다’라고 집착하여 생긴 것이다. 그러니 이 괴로움은 세상의 실상인 연기(緣起), 즉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있거나 없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비로소 사라질 수 있다(滅). 그 이전엔 어떤 방편을 쓰더라도 괴로움을 일시적으로 가라앉혀 놓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연기를 깨닫는다는 건 물질이든 생명이든 정신이든 끊임없이 주변과 연관관계를 맺으며 복잡다단한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라고 하는 것, ‘상태’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런 관계망 속에서 일시적으로 드러난 것을 취(取)한 것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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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신작용은, 유식으로 보면, 대상(他)들에 의지(依)해서 일어날(起)뿐인 현상(依他起性)들을 두루 분별해서(遍計) 어떤 것(所)으로 잡는(執) 활동이다(遍計所執性). 우리 인간은 이 정신작용을 극대화하여 지금의 화려한 문명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정신적 번뇌도 만들었다. 그런데 집중의 상태에서 세상의 실상을 관찰할 때, 우리가 두루 분별해서 잡고 있는 ‘어떤 것’들은 그 자체로 ‘어떤 것’이 아니라(卽非) 이름일 뿐(是名)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름은 무언가를 임시(假)로 칭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즉 이름의 허망(幻)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은 복잡다단한 연관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自覺). 이렇게 이루어진 분명한 앎은 ‘두루 분별(遍計)해서 어떤 것(所)이라고 잡는(執) 마음 없이 대상(他)에 의지(依)해서 일어나는(起) 세상만사의 실상을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를 마음의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 한다.

마음의 세 가지 상태(‘욕망의 세계, 이름은 욕망이다’ 참조) 중 마지막인 원성실성은 ‘있는 그대로의 참된 실재’인 진여(眞如)를 의미한다. 진여는 연기의 실상을 아는 마음인 것이다. 이는 ‘나’와 ‘타’가 분리되지 않은 둘 아닌 세계가 인식 전반에 현현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유식에서는 이를 ‘전의(轉依)’라고 한다. 전의란 ‘의지처가 변화하다’란 뜻이다. 우리의 평소 정신작용은 사물을 분별하여 ‘이것이다’라고 잡는 마음에 의지하고 있다. 즉 분별의 마음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분별의 마음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후 다시 분별의 마음을 낳는다. 세세생생 그렇게 분별하며 괴로움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그런데 이름의 허망함과 연기의 실상을 아는 것은 ‘분별의 마음’에서 ‘무분별의 마음’으로 마음의 의지처가 변화하는 것이다.

무분별이란 분별하지 않음이 아니다. 분별적 생각과 분별적 말을 쓰더라도 그 생각과 말에는 고유한 자성이 없음을, 수많은 인연의 관계망에서 그 생각과 말이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있음을 분명히 알면서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쁜 사람’이란 말을 쓸 때,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천지에 없음을, 내가 처한 여러 조건 상 인연 상 저 사람을 ‘나쁜’이란 말로 표현하다는 것, ‘나쁜’은 만고에 내 착각이라는 것, 조건이 바뀌면 ‘나쁜 사람’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자각하면서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를 ‘무분별의 마음’으로 마음의 의지처(依)가 변화한 것이라고 한다. 같은 생각, 같은 말 또는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집중의 상태에서 능히 세상의 실상을 관찰하며, 이름의 허망함과 연기의 실상을 분명히 자각하는 마음으로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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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에서 ‘무분별’로의 의지처의 변화. 인간의 정신현상에서 생긴 괴로움은 이때 비로소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때 물질은, 생명은 그리고 정신은 중중무진으로 온 세상과 관계를 맺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이다. 중생에 대한 보살(대승불교에서 제시한 새로운 인간상)의 자비심은 바로 이 자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전의는 분별에서 무분별로의 전환이다. 이는 번뇌가 새는 유루에서 번뇌가 새지 않는 무루(無漏)(‘마음이 쉴 때 알 수 있는 것들(1)’ 연재 참조)로의 전환이기도 하다. 번뇌가 새지 않으니 일단 우리에게 이롭고(自利), 타인과 연결된 존재라는 인식은 (타인 포함) 다른 생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다르게 변화시킨다. 나만(또는 우리만) 잘살자가 아니라 같이 공존할 수 있는 길(利他)을 적극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연결망 속에 ‘나’가 임시로 출현한다는 것을 진심으로 안다면, 어떻게 다른 생명에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영성(靈性)이 필요한 시대

흔히들 지금을 영성(靈性)이 필요한 시대라고 한다. 물질이 극도로 발달하여 숭배에 까지 이른 나머지 생명을 경시하는 현상이 만연한 이 시대에 대한 처방이다. 처음 ‘영성’이란 말을 들었을 땐, 독실하게 하느님을 믿거나하면서 생기는 종교적 체험 또는 집중 명상 시 체험하는 특별한 상태 정도로 생각했다. 소위 ‘영적 현상’을 영성으로 생각한 것이다. 영성을 사전적으로는 ‘신령스런(靈) 마음의 성품(性)’이라고 한다. ‘신령스런(靈)’이란 말 때문에 ‘신비한 현상’으로 영성을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유식을 공부해보니, 신령스런 마음의 성품, 즉 영성이란, 단순한 영적 현상이 아니라, 집중의 상태에서 세상의 실상을 관찰하여 사유한 끝에 깨닫게 되는 정신의 질적 변화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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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는 정신활동을 시작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으려 했다. 이를 위해 집중의 상태에서 세상의 실상을 관찰하는 사유를 극도로 밀고 나갔다. 그 끝에 깨달음 즉 연기에 대한 통찰로 인간 정신활동의 질적 변화의 길을 찾은 것이다. 정신의 질적 변화는 작게는 우리의 괴로움(번뇌)을 사라지게 할 뿐 아니라 모든 생명이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열기도 한다. 그러니 어찌 신령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신령스런 정신활동(유식에서는 이를 ‘묘관찰지(妙觀察智)’라고 한다), 즉 영성이다. 분별에서 무분별. 아니 무분별의 인식의 지반(轉依)에서 세상을 관찰(분별)하고, 그 관찰을 바탕으로 행위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마음을 아는 것이다. 분별의 극단에서 잔인한 생명 경시현상이 판치는 인류에게 이 마음의 전환은 어쩌면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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