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하(살림당)

연구실에서는 매년 다르게 펼쳐지는 공부 장에서 매년 다른 공부를 하게 된다. 올해 작년과 가장 다른 것 중 하나를 꼽아보자면 ‘청공자 용맹정진(이하 청용)’ 프로그램의 매니저로 공부하게 된 것이다. 청용은 ‘공부로 자립’하고자 하는 청년 백수들과 함께 공부 길을 열어가는 일 년 프로젝트로, 같이 공부하고, 활동하고, 생활하며 일상 전반을 공부로 삼아보는 실험을 한다. 그래서 연구실 공부에 더 밀도 있게 접속하고 싶은 친구들의 입구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청용 매니저는 이렇게 공부를 하러 온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고, 연구실에 먼저 온 선배로 이런 저런 개입도 하고, 청용 장 전체를 보면서 같이 움직인다. 매니저의 역할이란 자잘하게는 세미나 준비, 다음 학기 준비, 담임선생님과의 소통 등등이 있겠지만, 정해진 ‘업무’가 있다기보다는 늘 ‘청용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는 것 자체가 그 역할이다. 그래서 ‘청용 매니저’라는 것은 그것을 하고 있는 사람을 통해 매번 해석된다.

사진 1
‘청용 매니저’라는 것은 그것을 하고 있는 사람을 통해 매번 해석된다.

위험한 확증편향

지난 5월, ‘매니저’라는 말을 다시 해석해야만 하게 된 사건을 만났다. 그것은 청용 멤버 중 한 친구가 처음 프로그램을 신청했을 때와 다르게 ‘공부’에 마음을 내지 못하게 된 일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5월’이라는 것도, ‘누가’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런 일은 사실 누구에게나 수시로, 무시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매니저가 이 친구와 어떻게 함께 해나가야 하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공부하기를 버거워할 때 나는 그와 어떻게 무엇을 함께 해야 할까’는 사실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질문이다. 그 현장에서 내가 이 질문을 들고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막상 그런 순간들에 나는 오히려 내 (약간의) 밑바닥을 볼뿐이었다^^;. 청용 친구들과 만나기 전에도 많은 동기들과 비슷한 일을 여러 강도로 겪었지만, 남는 것은 결국 서로에 대한 실망이나 화 같은 감정뿐이었고, 그 (사람만 달라진 채) 반복되는 악굴레에 있으면서도 문제의 원인을 밝혀내거나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지 못해왔다.

그러니까 5월의 일은 다시 한 번 찾아온 W의 일이었고, X의 일이었고, Y의 일이었다. 구체적인 사건을 다 떼놓고 이런 일들에서 반복되는, 문제가 되는 회로는 바로 ‘공부하기가 싫어…’ 혹은 ‘공부하는 것에 회의가 들어…’ 라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받는 때부터 확증편향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 메시지를 보낸 친구의 과거는 ‘공부하기 싫어’라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재조립되고, 그가 현재 보여주는 행보도 모두 그 메시지를 중심으로 해석되기 시작한다.

이 확증편향이 시작되면 그 친구가 실제로 ‘공부하기 싫은’ 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그 친구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척 제한된다.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에서 나올 수 있는 수많은 길은 순식간에 ‘친구가 어떻게 하면 (공부가 아닌) 자기 욕망을 잘 인식하고, 공부를 잘 그만둘 수 있을까’의 문제로 축소되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공부하기 싫은 친구를 억지로 공부하게 할 수 없기도 하고, 친구가 자기 욕망이 어디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해야 한다. 하지만 함께할 방법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정해놓는 순간 ‘공부를 하고 싶다’는 친구의 메시지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포착할 수 없고, 다른 국면으로라도 펼쳐질 친구의 공부 길도 같이 모색할 수 없게 된다.

사진 2
‘공부하기 싫은’ 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그 친구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척 제한된다.

관계의 중심을 잃지 않기

나에게 5월의 사건이 그동안 W, X, Y등과 함께 겪었던 일과 달랐던 것은 내가 청용 매니저라는 자리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 자리에 있으니 내가 이런 확증편향을 갖게 되면, 친구의 공부를 열어주기는커녕 막아버리는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퍼뜩 알게 되었다. 그 친구와 이야기는 점점 안 통하게 될 것이고, 나는 점점 반(反)-매니저가 되어갈 것이다. 같이 공부할 친구를 더 잘 잃어버릴 것이고, 그냥 헤어질 수도 있는 것을 나쁜 영향을 주면서 헤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악굴레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매니저든, 친구든 간에 말이다.

이런 굴레에 들어가는 것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크게는 관계의 중심을 같이 잃었다는 것에 원인이 있다. 연구실에서는 공부를 중심으로 관계를 만들어간다. 공부를 하기 위해 모이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배울 수 있는 사이가 되려고 하고, 각자가 자기 공부를 하고 있다는 믿음 위에 서있다. 어떤 사건 속에서 친구의 공부 혹은 나의 공부가 흔들리는 것과 함께 관계가 흔들릴 수 있지만, 역시 중심은 공부에 있다는 것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관계의 거리나 강도가 조정되는 과정을 겪는 것이지 중심이 달라지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말로, 함께하는 공부의 강도나 방식이 조정되는 것이지 공부가 끝났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관계의 중심이 ‘공부’라는 것을 잃지 않는다면, 공부의 장이 (청용에서 일반세미나로, 혹은 연구실 안에서 연구실 바깥으로) 바뀌더라도 서로의 공부를 응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삶에서 ‘공부를 그만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 누구든 어떤 때에는 ‘공부가 싫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매니저로서, 친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친구의 공부가 뚫릴 수 있는 길을 같이 모색하는 것이다. 그래야 같이 공부할 여지를 일방적으로 없애지 않을 수 있고, 친구의 공부를 인정하고 잘 보내줄 수도 있다. 우리 관계의 중심이 ‘공부’라는 것은, 관계가 흔들릴 때 더욱 잊지 않고 붙들고 있어야 한다.

다음에는 내 안에서든 밖에서든 만나게 될 W, X, Y를 이렇게 만나고 싶다. 물론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하겠지만^^ 관계-공부를 막는 게 아니라 다르게 열어갈 수 있는 마음과 지혜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매니저-도반으로서 우리의 W, X, Y의 어디서든 펼쳐질 공부를 응원할 것이다.

사진 3
관계-공부를 막는 게 아니라 다르게 열어갈 수 있는 마음과 지혜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5 2 votes
Article Rating
guest
0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
0
Would love your thoughts, please comment.x
()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