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숙(감이당)

번뇌에서 선으로

괴로움은 번뇌와 수번뇌의 마음작용(心所)으로 드러난다(‘우리 삶에서 마주하는 괴로움의 모습들’ 참조). 번뇌의 마음작용에는 욕심이나 탐욕을 부리는 탐(貪), 냉혹하고 자비심 없이 분노하는 진(瞋), 어리석은 치(癡), 타인과 비교하여 자신은 높이고 타인은 낮추어 보는 만(慢), 이치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의심하는 의(疑), 잘못된 견해들인 악견(惡見)이 있다. 수번뇌의 마음작용은 번뇌의 마음작용에 따라 일어나는(隨) 마음들인데, 예컨대 원한을 품는 마음(恨)이나 자기 잘못을 숨기고 싶은 마음(覆), 질투하는 마음(嫉), 동정 없이 생명을 해치는 마음(害), 흥분하여 소란스러운 마음(掉擧), 지나치게 가라앉아 의기소침한 마음(昏沈), 진리를 믿지 않는 마음(不信) 등이다. 우리 삶에서 번뇌와 수번뇌의 마음작용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은 한마디로 괴롭다는 것이다. 집중으로 마음을 제어하여 잠시 청정함(마음 쉼)을 얻었다하더라도 또는 잠시의 휴식 시간을 가져 마음이 다소 평안해졌다하더라도, 일상에서 여전히 번뇌와 수번뇌의 마음작용이 활발하다면 아직 괴로움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전히 괴롭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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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궁금하다. 번뇌와 수번뇌의 마음작용이 우리의 괴로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우리 삶에서 괴로움이 사라지고 있을 때는 어떤 마음작용이 드러날까? 집중의 상태에서 세상의 실상을 관찰할 때 드러나기 시작하는 마음작용들. 유식에서는 번뇌와 수번뇌의 마음작용과 반대되는 마음작용으로 선(善)의 마음작용을 얘기한다. 선이란 과거와 현재 또는 현재와 미래, 즉 이세(二世)에 걸쳐 나와 타(他)에게 유익한 마음이다.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 또는 미래에도, 나에게만이 아니라 타인 또는 다른 생명에게도 유익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일상에서 번뇌와 수번뇌의 마음작용이 많이 드러난다는 것은 아직 괴로움 속에 있다는 것이고, 선의 마음작용이 많이 드러난다는 것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삶에서 괴로움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는 선의 마음작용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선의 마음작용을 살펴보는 것으로 괴로움이 사라질 때의 우리 삶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다.

괴로움의 소멸은 믿음(信)에서 시작

선의 마음작용(善心所)에는 11가지가 있다. 신(信), 참(慚), 괴(愧),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 근(勤), 안(安), 불방일(不放逸), 행사(行捨), 불해(不害)이다. 그 중 첫 시작은 믿음(信)이다. 믿음이 선의 마음작용의 처음이라니. 사실 어리둥절했다. ‘선’이라 하니 왠지 처음부터 자비(慈悲) 같은 마음작용이 올 거라고 막연히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무엇을 믿는다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믿기에 괴로움이 사라질 때의 첫 마음작용이 믿음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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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번 『테라가타』를 읽는 세미나를 하고 있다. 『테라가타』는 초기경전이다. 부처님 당시 제자들(장로들)의 생활과 공부하며 수행하는 모습 그리고 그들의 깨달음의 내용을 시(悟道頌)와 인연담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떤 계기로 부처님을 만났는지, 어떻게 삶의 방향을 틀었는지, 그리고 깨달음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등 제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제자들이 부처님을 만나서 거룩한 경지(깨달음)를 얻기까지에는 공통되는 과정이 있다. ‘가르침을 듣고, 확신을 얻어, 출가해서, 용맹정진한다.’이다. 일단 출가를 하면 부처님은 제자들 각자의 근기에 맞는 명상 주제를 준다. 그런데 어떤 제자는 ‘통찰을 얻어’ ‘번뇌를 부수고’ 거룩한 경지에 이르는데, 어떤 제자는 그렇지 않다. 물론 공부해왔던 인연의 모습이 다르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이 과정에서 ‘확신을 얻어’라는 부분이 눈에 띄었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확신’은 ‘믿음(信)’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선의 마음작용(善心所) 중 첫 번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선의 마음작용은 번뇌나 수번뇌가 사라지기 시작할 때 드러나는 마음작용이다. 즉 괴로움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 드러나는 마음작용이다. 그러니 선의 마음작용의 첫 번째에 믿음이 있다는 것은 믿음이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첫 번째 조건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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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믿었을까? 기독교에서는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어야 진정한 믿음이라고 한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보고 깨우친 다음 얻는 확신이 믿음이다. 믿음은 “인과의 이치를 믿고, 부처님의 교설을 믿으며, 자신이 성불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갖고, 뚜렷하게 수행의 길로 나아가는 밑받침이 되는 생각”(『불교 유식학 강의』 장익 지음, 정우서적)이다. 그러니 확신을 얻었다는 것은 이 가르침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깨달음으로 연결된다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정진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숲에서 같은 모습으로 용맹정진하더라도 그 결과는 다르다.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트는 믿음, 그 믿음이 공부를 대하는 그리고 삶을 대하는 그들 마음의 모습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테라가타』에 나오는 부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거룩한 경지에 든다. 거룩한 경지에 들었다는 것은 괴로움을 일으키는 마음의 작용(번뇌와 수번뇌)이 멈추었다는 것, 즉 괴로움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 공부의 첫 시작이 믿음이라는 것은 괴로움은 진리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부끄럽고(慚) 또 부끄럽다(愧)

그런데 믿음이 생기기 전에 ‘가르침을 듣고’라는 부분이 있었다. 불교의 믿음은 듣지 않고도 보지 않고도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본 것, 내가 들은 것, 그것을 바탕으로 사유한 것에서 믿음이 생긴다. 유식은 여러 마음작용(51가지)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중 별경심소(別境心所)라는 것이 있다. 별도의 대상(境)에 대해 활동하는 마음작용이라는 것이다. 이중 ‘승해(勝解)’라는 마음작용이 있는데, 이는 대상에 대해 뚜렷하게 견해를 가지려는 마음작용이다. 가르침(敎說) 등을 듣고 이러이러하다고 인지하는 경우를 말한다. 믿음은 이 승해를 바탕으로 생긴다. 가르침을 통해 인지해서 알게 되고 이 알게 된 것을 바탕으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이 생겼을 때야 비로소 그 가르침대로 살고자하는 의욕(欲, 별경심소 중 하나)이 생긴다. 『테라가타』에서 제자들은 확신을 얻은 다음 출가(出家)를 한다. 출가는 집을 떠난다는 말이다. 기존의 삶의 방식에서 다른 삶으로 방향을 트는 행위이다. 괴로움을 만드는 욕망의 삶에서 완전히 떠나기 위해 삶의 방향을 트는 행위. 이는 자신이 믿는(信) 바대로 살고자 하는 의욕(欲)의 표현이다. 욕망의 욕(慾)에서 청정한 삶으로의 욕(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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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는 집을 떠난다는 말이다. 기존의 삶의 방식에서 다른 삶으로 방향을 트는 행위이다.

이렇게 방향을 튼 다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선의 마음작용은 믿음(信) 다음에 참(慚), 괴(愧)가 온다. 참괴는 부끄럽다는 뜻이다.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는 것. 처음 마음작용(心所)에 대해 공부할 때, 참괴가 믿음 다음에 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믿음으로 의욕을 일으킨 다음 용맹정진하며 공부하면 되지 않는가. 왜 부끄러운가? 근데 생각해보니 믿음 다음에 부끄러움이 오는 것이 맞다. 믿음을 일으켜 출가(삶의 방향을 튼)한 사람들에게 처음 일어나는 마음이 무엇이겠는가. 기존의 삶의 방식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마음. 기존의 삶의 방식에 습관화된 자신의 마음이 보이지 않겠는가. 탐욕과 분노와 무지에 눈이 멀어있었던 자신이 보이지 않겠는가. 참(慚)은 법(다르마)에 비추어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괴(愧)는 세간의 힘에 의지하여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즉 참은 진리에 비추어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악업을 저지른 것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감이당 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 나도 한동안 부끄러움의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스스로 부족한 것이 많음에도 알지 못하고 살았던 시간들에 대한 부끄러움, 새롭게 알게 된 삶의 방식에 못 미치는 나의 생활에 대한 부끄러움이 공부할 때마다 올라왔다. 물론 그 부끄러움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계속 공부하는 것 아니겠는가. 알지 못함(무지)과 배움에 못 미치는 생활에 대한 부끄러움. 이건 스스로가 감당하는 부끄러움이다. 그래서 참회란 말이 있나보다. 참회는 신이나 다른 누군가에 대해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괴는 타(他)에 의해 자신이 저지르는 악업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스스로는 알지 못했던 것을 타인에 의해 알게 되어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악업이라 생각 못했는데 타인의 지적이나 수치심을 유발하는 일에 의해 부끄러움을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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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상되고 더 나은 것에 대한 인식이 없을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부끄러움이 있다는 것은 기존의 삶과는 다른 향상되고 나은 삶을 봤다는 것이다. 집중의 상태(止)에서 관찰을 일으켜(觀) 세상의 실상을 깨닫고, 그렇게 깨달은 실상에 맞는 삶을 봤다는 것이다. 그 삶에 비추어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그러니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더 나은 삶을 내면화했기에 가능하다. 이 부끄러움이 기존의 욕망을 떠나 다른 삶을 살도록 한다.

다른 생명에 해롭지 않다(不害)

부끄러움이 지극해졌을 때 우리는 기존의 욕망을 떠난다. 그리고 다른 삶을 살고자 한다. 참괴 다음에 오는 선의 마음작용은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이다. 외부 대상에 대해 지나친 욕심이나 탐욕에서 벗어나고, 대상에 집착하지 않으니 성내는 마음을 갖지 않게 되며, 탐하고 성내지 않는 상태에서 세상의 실상에 대해 밝게 알게 된다. 우리 마음에 근본번뇌인 탐진치 삼독(三毒)과 반대되는 삼선근(三善根)이 생기는 것이다. 무탐은 보시(布施)와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 남에게 재물을 베풀든(財施) 법을 베풀든(法施) 두렵지 않는 분위기를 베풀든(無畏施) 뭔가를 베풀 때는 무탐의 마음작용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무진은 자애(慈愛)의 마음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 타인에게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상대에게 성내는 마음을 품지 않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스승의 성내는 마음이다. 스승이 가르침의 방편으로 제자에게 성내는 것은 진의 마음작용일까? 무진의 마음작용일까? 당연히 무진의 마음작용이다. 제자의 삶에 대한 스승의 자애의 마음이 없다면 괜스레 성내며 마음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때의 성냄은 청정한 성냄이다. 마음속에 자애를 담고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을 틀기 위한 성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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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이 지극해졌을 때 우리는 기존의 욕망을 떠난다. 그리고 다른 삶을 살고자 한다.

진리의 가르침을 믿으며, 기존의 삶의 습관을 부끄러워하고, 무탐무진무치의 삶을 성실하게 정진하며 바르게 노력하다 보면(勤의 마음작용), 몸과 마음이 조화롭고 화평해지는 상태(輕安의 마음작용)가 된다. 이때도 계속 끊을 것(不善)은 끊고, 닦을 것(善)은 닦으며 게으르지 않게 행하면(不放逸의 마음작용), 마음은 들뜬 상태가 아니라 일상에서도 늘 고요하게 정리된 상태(行捨의 마음작용)로 머무를 수 있게 된다. 마음이 언제나 평등하게 정직하여 기복이 없는 상태, 즉 마음이 흥분상태로 있거나(掉擧)나 지나치게 의기소침해지지(昏沈) 않고 맑고 깨끗한 상태라는 것이다. 마음이 고요하게 정리되었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도 마음이 대상에 꺼둘리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근본번뇌와 수번뇌를 없앨 수 있는 탄탄한 근거가 마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본번뇌와 수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때 우리는 다른 생명들에게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해로움을 주지 않을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즉 다른 생명들에 해롭지 않은 마음작용을 일으킨다(不害의 마음작용). 나와 타, 인간과 다른 생명과의 공생(共生)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생생하게 함께 사는 열린 삶

유식에 의하면 괴로움(苦)은 번뇌와 수번뇌의 마음작용으로 드러나고, 괴로움이 사라질 때는 선의 마음작용이 드러난다. 그러니 선의 마음작용이 드러날 때 우리 삶이 어떤 모습인가를 아는 것은 괴로움이 사라졌을 때 우리 삶이 어떤 모습인가를 아는 것과 같다. 괴로움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다른 생명에 해롭지 않으며, 고요하게 정리되어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지혜를 일으킬 수 있는 바탕이다. 마음이 안정되면 능히 관찰을 일으킬 수 있는 최적의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테라가타』의 제자들은 스승에게 명상의 주제를 받은 다음 용맹 정진하여 ‘통찰을 얻고’ ‘번뇌를 부순다.’ 통찰을 얻기 전에 하는 용맹정진은 출가 전의 마음의 습성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탐,진,치의 삼독에 물들어 번뇌와 수번뇌의 마음작용이 치성한 상태에서 삼선근(三善根)이 자란 선의 마음작용으로 마음을 전환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지혜를 일으킬 수 있는 바탕이 되고, 이 바탕 위에 통찰을 얻고 번뇌를 부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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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에서는 두루 분별(遍計)해서 어떤 것(所)이라고 잡는(執) ‘마음 없이’ 대상(他)에 의지(依)해서 일어나는(起) 세상만사의 실상을 보게 될 때(圓成實性), 분별에서 무분별의 지혜가 생긴다고 한다. 이를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하는데, 식(識)이 변화하여 지혜를 얻는다는 뜻이다. 식은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으로 나누어 사물을 분별하고, 이 분별된 것을 아뢰야식에 저장하여 다음 찰나의 분별을 만들며 세세생생 유전한다. 이런 허망한 식에 의해 윤회(輪廻)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식득지는 식이 더 이상 세세생생 유전하는 삶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허망한 습을 반복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지혜를 바탕으로 매순간 새롭고 생생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삶에서 선의 마음작용으로 많이 드러난다는 것은 괴로움의 소멸뿐만 아니라 지혜를 바탕으로 한 삶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음의 증거이다. 이 삶은 욕망에 의해 닫힌 삶이 아니라 나에게도 다른 생명에게도 이로우면서 함께 살 수 있는 열린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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