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숙(감이당)

유루(有漏)에서 무루(無漏)

이제 마지막 글이다. 그러니 유식을 공부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인지 써보고자 한다. 수많은 어려운 개념과 아리송한 이해를 거치며 ‘아! 그럼 이렇게 살아야겠구나’하고 생각했던 것.

유식에서 가장 재밌고도 낯선 개념 중 하나는 아뢰야식이다. 매순간 변하면서 우리 삶을 현현시키는 근본식이라니. 이 아뢰야식엔 수많은 종자들이 저장되어 있다고 한다. 종자는 기억된 경향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아뢰야식에 어떤 종자가 기억되어 있느냐에 따라 삶을 괴롭게 경험할 수도 있고, 행복하게 경험할 수도 있다. 부유하고, 아이들도 별 문제없고, 하는 일도 잘되고, 건강해서 딱히 괴로울만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도 늘 괴롭다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싶지만, 유식으로 보면 아뢰야식에 번뇌를 일으키는 종자(유루)가 많기 때문이다. 유루의 종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늘 번뇌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오죽하면 ‘늘 번뇌가 새고 있다’는 뜻인 유루이겠는가. 실제 괴로운 삶이 아니라하더라도 삶을 괴롭게 인식하는 종자가 많기 때문에 괴롭게 경험하는 것이다. 반면 아뢰야식에 무루의 종자, 즉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종자가 많을 때는 삶을 행복하게 경험한다. 외부적 조건이 어떠냐에 상관없이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어떠냐에 따라 괴로움의 삶을 반복할 수도 있고, 거기서 벗어난 삶을 살 수도 있다. 유루에서 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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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루의 종자는 어떻게 생길까?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행위, 말, 생각은 업과 명언 종자로 아뢰야식에 저장된다. 이때 업과 명언은 유루의 종자로 저장된다. 어떤 행위든 말이든 생각이든 번뇌 속에서 행해지고 다음의 번뇌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안으로 ‘집중’하는 상태에서 세상의 실상에 대해 ‘관찰’을 일으키며 하는 행위, 말, 생각은 다르다. 같은 업과 명언이지만 무루의 종자로 저장되는 것이다. 집중은 세상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거울 같은 마음 상태를 만들고, 관찰은 그 상태에서 세상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 이런 상태에서의 행위와 말, 생각은 번뇌를 만들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부처님은 깨달으신 다음에도 수많은 행위와 말과 생각을 하셨다. 그런데 그 속에 어디 번뇌가 남아 있었겠는가.

번뇌에 휘둘리지 않고 고요하게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상태(止)와, 그 상태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욕망에 꺼둘리게 하는 원인을 사유하여 세상 모든 것들은 서로 연기(緣起)되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임을 아는 관찰(觀)의 행위는 아뢰야식에 무루의 종자로 저장된다. 그러니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정신을 집중하고,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삶의 실상을 관찰하는 노력, 그 단 한번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의 시작, 유루에서 무루로의 변화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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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제대로’라는 것이 쉽지가 않다. 일단 정신을 집중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세상은 온통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것들뿐이다. 문명이 발달하고 문화가 발전하면서 더욱 그러하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화려한 형상, 소리, 맛에 접속할 수 있으니 우리의 눈과 귀와 혀는 늘 자극으로 혼란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집중이라니. 그리고 세상의 실상을 관찰한다는 것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미디어를 통해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들이 있지만, 어느 것이 세상의 실상을 관찰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인지 모른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 하면서 표류하듯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집중의 상태에서 세상의 실상을 관찰하면서 증장(增長)된다는 무루 종자는 마치 신기루 같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집중이 가능한지, 어떻게 하면 세상의 실상을 관찰하는 마음을 낼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마지막 글은 이것에 대한 탐구이다.

집중하는 마음을 위한 계(戒)

우리가 관계 맺는 환경은 의식하든 하지 않던 우리 아뢰야식에 훈습된다. 생선가게 근처에 오래 살면 생선 냄새가 몸에 배이고, 향(香)가게 옆에 오래 있으면 향내가 몸에 배이듯, 환경 즉 우리가 만나는 연(緣)은 아뢰야식에 있는 종자(因)에 끊임없이 영향을 준다. 그러니 환경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는 종자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와 관계가 있다. 어떤 환경은 번뇌를 일으키는 유루의 종자를 자극해 더 빨리 현현하게 하고, 어떤 환경은 번뇌를 일으키는 종자의 성질을 바꾸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계율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깨달음에 이르려는 자는 반드시 세 가지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계, 정, 혜 삼학(三學)이다. 계(戒)는 계율(戒律)을 지켜 실천하는 것을 말하고, 정(定)은 마음을 집중시켜 산란하지 않게 하는 것을 의미하고, 혜(慧)는 세상의 실상을 통찰하여 괴로움의 원인을 통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집중의 상태(止)에서 능히 세상의 실상을 통찰(觀)하는 행위는 정(定)과 혜(慧)를 닦는 수행이다. 그런데 정과 혜를 닦으려면 반드시 먼저 행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계(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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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가게 근처에 오래 살면 생선 냄새가 몸에 배이고, 향(香)가게 옆에 오래 있으면 향내가 몸에 배이듯, 환경 즉 우리가 만나는 연(緣)은 아뢰야식에 있는 종자(因)에 끊임없이 영향을 준다.

계는 계율을 의미한다. 계(戒)는 좋은 습관, 윤리, 도덕적 행위와 같이 수양적 덕목을 의미하고, 율(律)은 불교 교단에서 설정한 출가자들을 통제하는 규범을 의미한다. 그러니 ‘계’는 스스로 좋은 습관과 윤리적 행위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고, ‘율’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좋은 습관과 윤리적 행위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계율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는,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말고, 남의 것을 훔치지 말며, 음란한 짓을 하지 말 것과 같이 바른 행동(身)과 관련된 것과, 거짓말을 하지 말고, 이간질하는 말을 하지 말며, 험담이나 비방을 하지 말 것, 거친 말이나 쓸데없는 잡담을 하지 말 것과 같은 바른 말(口)에 대한 것과, 탐욕을 부리지 않고, 화내지 않으며, 그릇된 견해를 갖지 않는 것과 같이 바른 의도(意)에 대한 것이 있다. 처음 계율이란 말을 들었을 땐 굉장히 수동적이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미리 정해놓은 것을 따라야만 하는 규칙이나 법 같은 것. 그런데 유식을 공부하면서 계율을 다시 생각해보니, 계율은 ‘내가 사는 환경을 내가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계와 율을 지니느냐에 따라 같은 환경이라도 다르게 구성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계율은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예컨대 아침에 일어나서 15분, 저녁에 자기 전에 15분 명상을 하겠다는 계율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고요하고 차분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휴대폰이나 TV는 수많은 정보를 전달받거나 전달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다. 하지만 나름의 계율 없이 사용할 경우엔 나도 모르게 살인, 폭력, 음란, 거짓말, 비방, 쓸데없는 잡담, 탐욕, 분노, 어리석음 등을 끊임없이 훈습하는 도구가 된다. 그러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며, 어떻게 접속할 것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계율은 중요하다. 그리고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에서 함께 무엇을 지킬 것인가는 공동체 전체가 불필요하게 산란해지는 일들을 방지할 수 있다. 일상의 어떤 상황에서도 집중(定)을 유지할 수 있다면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하는데 도움을 받기 위한 계율’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통의 우리는 그렇지 않다. 그러니 내가 사는 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계율, 특히 마음을 산란하지 않도록 스스로의 환경을 만들기 위한 계율은 중요하다.

지혜의 소리를 들어라

계율은 ‘집중’을 계발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면 세상의 실상을 ‘관찰’하는 마음을 낼 수 있는 데는 무엇이 도움이 될까? 나의 불교 공부의 시작은 『금강경』 사경이었다. 사경은 글자를 베껴 쓰는 것을 의미한다. 한자를 잘 몰랐기 때문에 『금강경』에 나오는 글자 하나하나가 그림 같았다. 처음엔 한자 하나하나의 뜻은 물론이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저 글자들을 베껴 썼다. 하지만 그렇게 내 인식에 들어온 낯선 글자들은 그 다음 세상을 볼 때 질문을 던지는 근거로 작용했다. 뭐지? 왜?라는 짧은 질문들. 철학자들처럼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아니더라도 매일 마주치는 일상에 소박하게 질문을 던지도록 했다. 지금 쓰고 있는 유식에 대한 글도 마찬가지이다. 유식에 대해 많이 알고 글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매일 조금씩 공부하면, 다음날 조금씩 질문이 올라왔다. 질문은 사유로 이어지고 그 사유를 글로 써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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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매일의 공부들 그리고 이 공부들에서 생긴 소박한 질문들은 사유(思惟)를 촉발하고, 이렇게 촉발된 사유는 향 가게 옆에 오래 있으면 저절로 향내가 몸에 배이듯 우리 아뢰야식에 저장(훈습)된다. 그리고 어느 날, 세상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 질문이 세상의 실상에 대한 관찰을 일으킨다.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우리는 사는 대로 살 수밖에 없다. 질문이 없다는 것은 기존의 삶을 반복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반복은 기존에 훈습된 유류의 종자들의 반복이다. 즉 윤회이다. 그러니 매일의 공부, 그 작은 공부가 삶을 바꾸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세상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공부를 매일 조금씩이라도 하는 것, 이를 유식에서는 ‘정문훈습(正聞薰習)’이라고 한다. 바르게 들은 것들이 훈습된다는 의미이다. ‘들은 것(聞)’이라고 표현했지만 듣는 것뿐만 아니라 문자로 읽고, 그림으로 보는 것 모두가 포함된다. 여기서 바르다는 것이 중요하다. ‘바른 들음’이어야 한다는 것. 예전에 ‘광해’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다. 왕이 된 광대에 대한 이야기이다. 많은 감동적인 장면이 있었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왕이 왕비의 오라버니를 심문하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반역을 했냐는 왕의 질문에 왕비의 오라버니는 자신은 왕에게 그저 ‘들어라! 제발 들어라!’고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말하는 소리, 백성이 말하는 소리를 들으라는 것. 그게 반역이면 자신은 반역한 것이 맞다는. 그때 처음으로 듣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았던 것 같다. 그 장면 이후 영화 내내 눈물을 줄줄 흘렸던 기억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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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훈습의 바른 들음은 세상의 이치, 진리를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읽는다, 본다 등)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를 ‘고통’에도 ‘쾌락’에도, ‘있다(有)’에도 ‘없다(無)’에도, 항상(常)에도 단멸(斷)에도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중도(中道)의 지혜 곧 무상과 무아에 대한 지혜를 일으킬 수 있는 소리이다. 그 소리를 매일 공부하며 훈습하는 것. 이렇게 훈습된 것이 어느 날 세상의 실상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질문의 힘이 세상의 실상을 관찰할 수 있는 마음을 촉발시킨다.

선한 친구(善友)들

집중의 상태(止)에서 세상의 실상을 관찰(觀)하는 것은 아뢰야식에 무루의 종자를 증장시키는 행위이다. 무루의 종자가 증장될수록 우리는 괴로움에서 멀어진다. 실제의 삶이 어떤 모습이든 그것을 괴롭게 경험하는 것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무루의 종자의 증장은 지혜의 증장이다. 지혜가 자랄수록 모든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인식이 굳건하게 자리 잡게 되므로, 나와 타(他)가 모두 함께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사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는 마음(계율)과 세상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매일의 공부(정문 훈습)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여기서 마지막으로 하나 더 생각할 것이 있다. ‘이것이 혼자서 가능한가?’이다. 물론 타고난 근기와 타고난 지혜가 있는 사람은 혼자서도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뭐래도 평범하다. 그러니 이렇게 평범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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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경전을 읽다보면 자주 나오는 말이 있는데, ‘선남자’라는 말이다. ‘선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착한 사람? 그러고 보니 부처님이 ‘착하구나, 착하다’라며 제자들을 칭찬하는 말씀도 자주 있다. 유식에서는 ‘선’을 이 세상(此)에서도 다음 세상(彼)에서도, 여기(此)서도 저기(彼)서도, 즉 이세(二世)에 걸쳐 나와 타인에게 유익한 것을 말한다. 이 세상과 저 세상, 여기와 저기서도 유익한 것은 어떤 세상에서도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다. 이는 세상의 실상을 깨달아 그 이치대로 살 때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선남자’는 그런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이 ‘착하구나, 착하다’라고 하는 것은 제자들이 그런 삶을 실천하고 있을 때 칭찬하는 말씀이다.

좋은 벗을 갖고 좋은 동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이미 성스러운 도의 절반을 성취한 것이라고 아난 존자(부처님의 제자)가 말했을 때,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 좋은 벗을 갖고 좋은 동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성스러운 도의 전부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좋은 벗, 좋은 동료는 바로 ‘선한 친구(善友)들’이다. 선남자들. 세상의 실상을 깨닫고 그 이치대로 살고자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도의 전부라는 것. 이즈음에서 너무나 어렵고 너무나 멀게 보이는 깨달음의 길이 어쩌면 너무나 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벗, 그런 동료들과 함께 하는 것. 그런 벗, 그런 동료들과 계율을 갖고 매일 공부하며 함께하는 것. 나 혼자 깨닫는 것이 아니라 같이 깨닫자고 하는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보살’은 이런 원리를 잘 알기 때문에 생긴 개념인 것 같다. 혼자 보다는 같이하는 공부. 그리고 그 같이함이 점점 커지는 공부. 그렇게 같이하다보면 집중의 힘도 통찰의 힘도 자란다. 집중과 통찰이 자란만큼 괴로움에서 멀어지고, 괴로움에서 멀어진 만큼 ‘나’라는 작고 닫힌 세상은 ‘우리’라는 크고 열린 세상으로 바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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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유식을 공부하고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결론은 의외로 소박하고도 간결하다. 마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성스러운 마음의 원리를 알고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친구부터 찾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귀하고도 귀한 친구들과 함께하며 매일 공부하고 또 공부하라는 것이다. 그럴 때 삶은 진정으로 안락(安樂)하고 행복해지기 시작한다. <이상, 유식 연재는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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