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하(살림당)

작년 하반기, 선생님들(문샘+근영샘)의 깨봉->나루 스튜디오 이사 계획이 급 발표되면서부터 ‘살림당’ 다섯 명의 운명도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살림당’은 남산강학원 청년공자스쿨 1기에서부터 3년(지금 시점에서는 4년)간 같이 공부한 인연으로, 강학원에서 공부+활동을 하며 ‘사는 법’을 연마하고 있는 청년들이다(당黨은 아니다). 깨봉이 본격적으로 청년들의 본거지가 되면서 우리 자신이 전보다 적극적으로 이 깨봉을 공부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주체가 되어야 했다. 

그 시작은 어떤 공부방을 만들고 싶은지를 의논하는 것이었고, 그 뒤로도 어떤 공부를 하고 싶은가, 어떤 공간을 만들고 싶은가를 기준으로 이런저런 고민들을 해오고, 많이 배우고 있다. 어떻게 이 공부 공간을 꾸려나갈 것인가, 하는 질문은 관계에 대한 고민도 포함한다.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나갈지가 곧 공부/공간을 만들어가는 하나의 축이 될 수 있다. 이야기가 멀리서 시작했는데, 이번에 쓰게 될 이야기가 바로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나의 습관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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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공부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나갈지가 곧 공부/공간을 만들어가는 하나의 축이 될 수 있다.

1.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인가?

남산강학원에서 올해 상반기부터 상주하며 같이 공부하고 있는 친구들은 스무 명 남짓 된다. 주로 청공자 영성탐구, 청공자 용맹정진이라는 청년 장기 프로그램에서 공부하고 있는 친구들이다. 같은 프로그램에서 공부하지 않더라도 같은 공부방에서 공부하고,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기 때문에 매일 얼굴을 보고, 서로에게 일어나는 일이 투명하게 공유된다. 그럼에도 공부나 활동을 같이 하면서 서로를 겪는 것은 좀더 밀도가 높은 일인데, 말 그대로 수행이 덜 된 서로의 우둘투둘함이 마찰하며 온갖 관계의 파노라마를 연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부, 활동을 같이 하게 되면 나와 상대의 우둘투둘한 공부 지점을 사건이나 감정 속에서 구체적으로 발견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내가 보지 못하고 있던 나의 문턱을 같이 봐줄 도반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꼭 좋은 방향으로만 가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문턱에 대해서 서로를 너무 빨리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글에 쓰고자 했던 내 습이다. ‘공부 지점’이 된다는 것은 그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는 말과 같다. 반복되지 않으면 이미 넘어간 것이기 때문에 굳이 문턱이라고 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 나는 활동을 같이 하면서 친구의 문제가 반복된다고 느끼면, 어느 시점부터는 제대로 짚어주기 보다는 쉽사리 손을 놓아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또 그러는구나! 하고 말이다.

이 습을 포착하게 된 것은 한 친구가 자기한테 화를 좀 과하게 내는 것 같다고 이야기해줬기 때문이다. 자기가 뭘 잘못했을 수는 있는데,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인 건지?^^;. 그렇다면 나는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친구의 문턱에 대해서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저 친구는 또 그러는구나!’하는 생각에 화가 나고, 그 다음에 그 친구를 볼 때에도 쉽게 ‘또 그러는구나!’하면서 화를 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다루기 쉬울 것 같은 나 자신의 문제에 있어서도 같은 습을 일으키고 있었다. 잘 안 되는 일에 있어서는 ‘해도 소용이 없다, 에잇’ 하면서 금세 놔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될 대로 되라 궤도에 진입한다. 여기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조언을 해줘도, 안 되는 걸 왜 자꾸 이야기하지 싶은 생각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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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활동을 같이 하면서 친구의 문제가 반복된다고 느끼면, 어느 시점부터는 제대로 짚어주기 보다는 쉽사리 손을 놓아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2. 면도칼을 든 수행자

요새 글고평(글쓰기 고전평론 프로그램)에서 읽고 있는『법구경』에 나오는 인연담 하나를 이어보려고 한다. 네 번째 장, ‘꽃의 장’에 나오는 고디까 테라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고디까 테라가 산 위의 바위에서 홀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고디까 테라는 무척 부지런한 수행자였다. 그런데 그가 일 년 삼매를 성취해서 깊은 수행에 이르렀을 때 몸에 병이 생겨버려 더 정진하기가 어려웠다. 수행도 몸으로 하는 것이라 병이 나면 마음을 집중해 깨달음으로 가는 데에 어려움이 생긴다.

그렇지만 고디까 테라는 산에서 내려와 몸을 치료하는 대신, 다시 수행에 매진하여 닙바나에 이르고자 했다. 그의 성심(誠心)에도 불구하고 병은 처음 그를 막아선 곳에서 계속 발병하여 더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것이 여섯 번이나 반복되었다. 고디까 테라는 다시금 쉬지 않고 매진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몸으로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고, 그는 결심한대로 면도칼로 목을 그었다. 바로 그 순간에 고디까 테라는 닙바나를 성취했으며, 동시에 죽음을 맞았다.

고디까 테라가 죽은 것을 알고 마라(죽음의 왕)는 테라가 ‘삼계’ 중 어디에서 다시 태어났는지 찾아보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변장을 하고 부처님께 가 고디까 테라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물었다. 부처님은 그가 아라한이 되어 해탈하였고, 다시 태어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어 “그가 계를 잘 지키고, 깨어있는 생활을 하며, 올바른 깨달음을 얻어 해탈을 성취했다면, 마라도 그가 가는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게송을 읊으셨다.

고디까 테라는 닙바나를 성취하기를 일생의 간절한 원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여섯 번이나 자신의 몸이 깨달음을 막아섰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일곱 번째 정진을 했다. 나는 이 이야기가, 무엇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넘어야 하는 문턱 앞에서는 무엇이 가로막더라도 오직 성심성의껏 정진하는 길밖에는 없다.

‘안 된다’는 것은 고디빠 테라가 깨달을 수 없는 삶-몸을 버리고 죽기를 선택한 것처럼 지금의 조건이 일의 성취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고, 그 다음에 몸이라는 마지막 조건을 바꾸기 위해서 면도칼을 들었다. 우리가 고디빠 테라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지금(이번 생에, 혹은 올해에 등등) 이것이 되냐, 안 되냐가 아니라 늘 어떻게 ‘되게 하냐’를 문제 삼아야 된다는 점이다. 그것이 죽음 뒤에 되든, 죽음 직전에 되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테라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고 마라가 찾지 못하는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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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디빠 테라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지금(이번 생에, 혹은 올해에 등등) 이것이 되냐, 안 되냐가 아니라 늘 어떻게 ‘되게 하냐’를 문제 삼아야 된다는 점이다.

3. out-tro

친구의 문턱이든, 나의 문턱이든, ‘안 되는’ 일들을 마주하게 될 때, 고디빠 테라를 생각해보려 한다. ‘안 된다’고 말하려면 면도칼을 들 정도의 정성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가는 길이 오래 걸리고 어려운 일들이 있다. 『법구경』에 머리를 깎는 동안에 슥 깨달아버리는 일곱 살 사마네라도 나오지만, 칼을 드는 데까지 가는 고디빠 테라도 있듯이 말이다. 그렇지만 둘 다 같은 닙바나에 이르렀다. 어려운 것과 안 되는 것은 다르다.

이 태도를 바꾸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연구실이 어떤 공부를, 어떤 사람들과 하는 곳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우리 모두의 문턱을 ‘안 될 일’로 단정하지 않고, 성심성의껏 계속 갈 때에만, 공부가 능력의 문제나 조건의 문제나 타고난 업의 문제 위가 아니라, 오직 정진하는 그 과정에 있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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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것과 안 되는 것은 다르다. 이 태도를 바꾸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연구실이 어떤 공부를, 어떤 사람들과 하는 곳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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