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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태후가 붕어한 이듬해인 원광 1년, 한무제는 현량천거(추천제도)로 유학자인 동중서와 공손홍을 발탁했다. 무제는 이번에도 유학자였다. 주지하듯 무제가 처음 즉위하여 뽑은 인재들은 유학자였다. 그러나 무제 2년에 뽑은 당시 조관, 왕장 등의 유학자들은 두태후의 황로정치를 넘어서지 못하고 전원 침몰한 바 있었다. 당시 유학은 왜 황로정치를 넘어서지 못했던 것일까?

  숙손통이 漢의 국가 예의를 제정하여 태상에 임명되었고 함께 제정에 참여한 여러 제자들은 모두 인재로 선발되었는데, 고조는 유학의 쇠퇴를 탄식하며 학문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었고 천하가 완전 평정된 뒤에도 학교나 교육을 행할 겨를이 없었다. 효혜제나 고후 시절에 공경은 모두 무력의 공신이었다. 효문제 때 제법 文學之士를 등용했다지만 문제는 본래 법가의 학설을 좋아하였다. 효경제때에도 유생을 등용하지 않았고 두태후 또한 황로술을 좋아했기에 여러 박사는 자리나 채우고 하문이나 기다렸으며 높이 등용된 자도 없었다.

「유림전」, 『한서』8권, 명문당, 211쪽

이미지 설명

사유는 형세에 의존한다. 아무리 훌륭한 사유라 하더라도 그 사유가 형성될 수 있는 형세가 마련되지 않으면 뿌리 내릴 수 없다. 한나라의 초기는 그러한 사유와 형세와의 관계를 정확히 보여준다. 한고조는 통일이후에도 여전히 제후국 및 흉노와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려 유학을 일으킬 여력이 없었고, 혜제와 여태후 시절에는 당시 정국을 주도했던 공신들이 모두 한고조를 도와 무력으로 일어난 인물들로 유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태평성대를 일군 문제는 법가의 학설을 좋아했으며, 그의 부인 두태후는 황로술을 숭상해 아들 경제치세의 대부분과 손자 무제 섭정 6년간을 황로의 무위정치로 다스렸다. 한나라 초기에는 이렇듯 자의든 타의든 유학이 안착할 수 없는 형세였다. 그 덕분에 백성들은 쉬면서,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심신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중서가 보기에 지금은 달랐다. 오랜 안정은 성장의 욕구를 낳고, 풍요는 사치를 낳는 법이다. 백성들은 점점 공검(恭儉)을 잊고 사치의 욕망을 내비쳤다. 황로의 정치가 작동할 수 없는 형세가 아래로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一郡이나 一國의 백성 중에서 조서에 응대하는 자가 없다는 것은 왕자가 곳곳에서 단절되었다는 뜻입니다. 신이 바라는 것은 폐하께서 태학을 진흥시키시고 명사를 두어 천하의 인재를 양성하시면서 자주 그 인재들을 시험하시고 자문하신다면 영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의 태수나 현령은 백성을 거느리는 장수이며 폐하의 뜻을 받들어 널리 교화를 펴는 사람입니다. 만약 백성을 인솔한 장수가 어질지 못하면 폐하의 덕을 펼 수가 없고 은택도 아래로 흐르지 못할 것입니다.

「동중서전」,『한서』4권, 명문당, 388쪽

동중서가 본 황로의 무위정치는 백성들을 쉬게 할 수는 있었으나, 인재 양성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당시 한나라는 ‘오초7국의 난’ 이후 제후를 견제하기 위해, 승상 뿐만 아니라 2천석 급의 관리들을 모두 중앙에서 뽑아 지방에 파견해야 했기에, 유례없이 많은 인재가 필요했다. 그러나 여전히 지방에는 황제의 조서에 즉각 응대할 수 있는 관료가 없을 정도로 인재가 부족했다. 제도를 정비 할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게다가 그나마 뽑아 놓은 ‘소리(小吏-말단관리)들은 학식이 얕아서 그 뜻을 다 알지 못하기에’ (「유림전」,『한서』8권, 명문당, 217쪽) 황제의 명령을 온전히 이행할 수조차 없었다. 그 결과 황제의 명령이 곳곳에서 단절되어 지방의 백성에게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실정이었다.

제국을 다스리는 수성의 정치학, 유교

유학자 숙손통이 한고조에게 “유생은 앞으로 나아가 얻지는 못하지만 이룬 것을 함께 지킬 수 있습니다. 신이 魯의 유생들을 데려다가 저의 제자들과 함께 조정의 의례를 제정하고자 합니다.” (「숙손통전」,『한서』3권, 명문당, 141쪽) 라고 말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유학은 천자를 중심으로 천하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수성의 정치학이다. 주지하다시피 제국을 통합하는 힘과, 통합된 제국을 유지하는 힘은 전혀 다르다. 진나라가 최초의 전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수했음에도 15년 만에 망한 이유는 전국을 통일한 바로 그 엄격한 법가의 힘으로 제국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진나라는 ‘수성의 정치’로의 모드전환을 하지 못한 것이다. 무제도 이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한나라가 태평하다고는 하나 언제까지 황로정치만을 고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